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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노의질주 Nov 19. 2020

쥐와의 마라톤 연습

   

친구 '쥐'와 어느 날 점심을 먹다가 쥐가 하프 마라톤 대회에 나가기로 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쥐는 작년에도 같은 대회에 나갔다고 했다. 쥐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잘 걷고, 튼튼한 사람이다. 평소 그에 못지 않게 곧잘 걷는 나는 오래 걷기와 오래달리기의 전혀 같지 않음을 무시하고 나도 같이 뛰고 싶다고 말했다.


   쥐와 헤어지고 집에 오자마자 들뜬 마음으로 대회에 등록을 했다- 등록해야지 하고 다짐한 지가 몇년이 지난 (그리고 아직까지도 등록하지 못한) 영어자격증 시험이 나에게 얼마나 괴롭고 큰일인지 이제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사실은 대회에 나간다는 사실보다 쥐와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쥐와 나는 머리가 크고 나서도 꾸준히 만나는 사이지만, 멀리 여행을 간다든지 달리기 대회에 나간다든지 하는, 뭔가를 작당모의한 적은 없었다. 대회 전까지 종종 만나 함께 대회를 준비할 생각에 기뻤다.

 

    하프 마라톤 대회와 결코 연관이 있거나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없지만, 나는 초등학교 때 반대표 계주 선수로 뛰었던 이력이 있다. 쥐에게 말했더니 본인도 그랬다고 했다. 서로를 알지 못하던 한때 다른 지역에서 이어달리기를 하던 아이 둘이 커서 같이 마라톤에 나가게 되는, 그런 완벽한 우연의 시나리오라니. 라고 생각하며 "오, 정말?"이라고 답했다. 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땐 키 좀 크면 무조건 계주 시켰잖아".

   정말 그랬다. 쥐는 160cm대 후반인 나보다도 키가 훨씬 크다(이렇게 얘기하면 '훨씬'이 얼만큼을 의미하는지 다들 궁금해할 거라는 걸 알지만, 쥐가 평소에 본인 키를 밝히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나는 대단히 큰 키는 아니지만 성장기의 많은 여자아이들처럼 키가 빨리 컸다. 계주 선수로 뛰었을 당시엔 반에서 두 번째로 컸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재능이나 의지에 상관없이 키 좀 크면 무조건 시켰다고 말하는 무덤덤한 쥐의 한마디에 한참을 웃었다. 쥐는 내 친구들 중에 가장 웃긴 친구다.

 

    쥐랑 자주 많은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 외에도 달리기 대회에 나가고 싶었던 이유는, 스스로와 솔직해 지자면, 올해 이룬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쥐가 작년에 나갔을 때 받은 상장과 메달이라며 찍은 사진을 꺼내 보여줬을 때 나도 그것을 받고 싶었다. 받고 싶다기 보다 필요하다고 느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하고자 했던 것은 많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올 한 해에 그래도 이 상장과 메달이 있다면 조금은 기쁠 것 같았다. 연초에 다녀온 여행 사진들 이후로 줄곧 황량한 나의 인스타 피드에도 이 근사한 성과를 자랑하는 사진을 한 장, 아니 여러 장 박고. 훗날 쉬는 동안 무얼 했냐는 물음에 나? 하프 마라톤에 나갔어!라는 대답을 할 수 있게 되겠지. 상대는 정말? 하고 되물을 것이고, 우리는 오래 달리기의 힘듦과 생활 속 운동의 중요성과 그 실천의 어려움으로 화제를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부록으로 덧붙이자면 우리에게는 체육시간 때처럼 키 순서대로 줄을 세운다면 나와 쥐 사이에 서 있을 법한 친구가 하나 있다. 독일로 유학을 간 이 친구가 올여름 한국에 놀러 왔었다. 우리 셋은 실컷 놀았고 처음 보는 사람들로부터 키가 큰 친구들이네요, 운동하시는 분들인가봐요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실컷 웃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실컷 놀고 웃느라 마라톤 준비를 거의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쥐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데 의의가 있었으므로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


   나와 쥐 사이에 서 있을 법한 친구는 오늘 아침 독일로 돌아갔다. 이제는 마라톤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매거진 42 vol.1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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