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영.가난하게 펼쳐진 손을 움켜쥐다.

by 바다에 지는 별

참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아침이다. 명진이 메일로 보내 주었던 노랫소리처럼.


어제와 같은 오늘이지만 분명 현영에게는 달라져 있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뜬다.

부스스 일어난 현영은 시원한 냉수 한 모금을 마시고 창 밖 풍경을 바라본다.


지나치게 달콤한 명진의 목소리는 분명 현영의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녀 인생에서 그렇게 달콤한 적이 있었는지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사랑의 세레나데.

참 간지러워 발가락이 움찔거리는 단어이긴 하지만 나이에 맞게 간질거리는 연애도 하고 유치한 말다툼으로 투닥거리는 자연스러움이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현영은 한번도 그런 풋내 가득한 연애를 해 본적이 없었다.


늘 참고 인내하며, 기다렸던 말 잘 듣는 모범생 같은 자신이 스스로 보아도 쉽게 질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자신의 사랑 방식에도 분명 문제가 있었음을 현영은 어렴풋하게나마 인정하게 되었다.



바닥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훤히 보이게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참 어려운 일이었다.

늘 괜찮다고, 다 좋다고 말하는 게 익숙했던 자신에게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자신의 요구를 표현하는 건 자신에게 과분하다는 생각을 해 왔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한숨이 나온다.


'그래. 어쩌면 내가 지나온 시간은 누군가가 아픔과 상처를 준 것부터 시작된 게 아닐지도 몰라.

내 스스로를 챙기지 못한 내 자신의 문제였는지도 모르지. '


명진의 그 단순하고 감상적인 노래 한 곡이 현영에게는 지나온 시간에 대해 깊은 상념에 사로잡히게 했다.




요즘들어서 자주 내리는 비에 현영의 마음도 자꾸만 가라앉았다.

일상이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고 있었지만 한번도 외롭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던 그녀였지만 요즘들어 자꾸만 외롭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고 그녀는 오랫만에 희경을 불러 내었다.


이슬비가 하루종일 왔다 갔다 했던 하루.

희경은 현영보다 10분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주문한 모듬 부침개가 나오고 둘은 건배했다.

"언니!! 왜 이렇게 바쁘셔? ㅎㅎㅎ"


"뭘 바빠? 맨날 그렇지. 너는 별 일 없었어? 계속 애기 아빠랑은 잘 지내고 있는 거야? "


희경의 눈에서는 웃음기가 가시지를 않는다.

"나야 뭐... 잘 지내지. 효진이 아빠도 요즘은 일찍 들어와서 같이 저녁도 먹고 그러니까 좋네. ㅎㅎㅎ"


"그래. 희경아.. 인생이 뭐 특별한 게 있니? 평범한 게 제일 행복한 거 잖니? 어쨌든 참 다행이다. 너 기다린 보람도 있고 얘.ㅎㅎㅎ"

이렇게 말하는 현영은 솔직히 마음 한 켠이 살짝 어두워지고 있었고 표정에서도 드러났다.


"언니! 그 앤디라는 분은 계속 연락하고 있는 거야? "


"응. 하고 있지. 그냥 편한 친구 같은 그런 관계야. 별 다른 건 없는데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 내가 뭐 지금 이 나이에 뜨겁게 연애한다는 것도 참 웃기고, 일본에 있는 그 분하고 특별하게 뭔가를 하려고 해도 그게 쉽겠니? 그냥 편하게 지내고 싶어. 괜히 힘들게 시작하고 이어나가는 것도 이제는 자신없고 귀찮더라고. "


"그렇긴 해. 그래도 마음이 많이 정리가 됐나보네? ㅎㅎㅎㅎ 예전에 그렇게 팔딱팔딱하더니? ㅎㅎㅎㅎ"


"ㅎㅎㅎㅎㅎ그러게. 그 때는 참 마음이 복잡했는데 다 욕심이 생기니까 그랬던 것 같아. 근데 뭐.. 상황이란 것도 무시 못하니까. 내가 그럴만한 여력도 안 되고. 그래도 지금이 좋아. 괜히 심각해져서 쓰는 것도 싫고. "


오랫만에 본 희경의 얼굴 빛은 참 밝아 보였고 목소리에도 생기가 있어 보였다.

평범한 행복 안에서 뒤 늦게 피어나고 있는 희경의 모습을 보며 현영은 서늘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 왔다.


그에게 도착한 메일을 다시 열어 보았다.

바람결에 연두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휘날리는 풀잎들을 바라보며 명진의 목소리를 다시 감상한다.

무언가가 빠져 있는 느낌.

누군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닌, 스스로가 채워야 할 무언가를 찾고 싶어진 현영은 그에게 메일을 썼다.






명진씨!!
참 아름다운 노을을 오랫만에 보네요.
비가 그쳤어요. 요즘 너무 자주 비가 오는 통에 하늘 한번 제대로 보질 못 했는데 이때까지의 보상이라도 하듯 너무 멋진 풍경을 선물로 주네요. ㅎㅎㅎ

지난 번 편지에 제가 외롭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실 그런 단어도 제 입에서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것조차 상대에게 부담이 될까 입 밖으로 꺼내기 매우 조심스러웠었지만 왠일인지 명진씨에게는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 스스로에게도 깜짝 놀랐네요. ㅎㅎㅎㅎ

그렇다고 명진씨에게 부담을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 작은 변화의 단편을 보여 드리고 싶었네요.

우리가 즐겨 쓰던 글의 주제가 외로움이었다는 거 기억하나요?
명진씨가 지난 번 올렸던 글에서 참 진한 외로움과 쓸쓸함을 엿보았어요.

우리는 어쩌면 그 외로움과 평생 친구로 지내면서 살아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채우려 욕심낼 수록 더욱 외로워진다는 거.
이미 몸으로 채득한 저로서는 지금의 명진씨와 저의 관계가 참 바람직해 보여요.
서로 욕심내지 않지만 외로움을 외롭다는 말로 정확히 뱉어낼 수 있는 관계.

그러나 부담스럽지 않은 서로가 있고 그 존재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지금.
저는 너무 좋네요.

어제 명진씨와 지난 번 식당에서 찍은 사진을 현상해서 제 화장대 거울에 붙였어요.
볼 때마다 가슴이 꽉 차오르는 느낌이 들어서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한번 씩 웃게 되요.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웃고 있는 제 자신이 저는 참 낯설지만 행복해요.
지나간 시간들이 제 발목을 잡는다 여겼던 그때는 제 얼굴 조차 보기가 힘들었지만 지금은 명진씨와 편하게 나란히 웃고 있는 저의 모습이 꼭 제 자식을 보면서 대견해 하듯이 저 스스로를 그렇게 바라보게 되네요.

고마워요.
다가와줘서 고맙고 ,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저도 명진씨에게 더할나위 없이 좋은 친구가 되어 드릴 자신이 제게는 있답니다.

사실 처음에는 너무 구두쇠 같은 명진씨 서운하고 얄미웠는데...ㅎㅎㅎㅎ 지금은 음...차곡차곡 매달 만원씩 부워 놓은 적금처럼 참 든든하고 의지가 된다고 할까요? ㅎㅎㅎㅎ
(역시 돈 얘기를 하니 뭔가 팍 와닿지 않나요?ㅎㅎㅎㅎ)

우리 지금처럼만 서로의 곁을 오래오래 지켜 주자구요.

더 욕심내지도 말고, 더 설레지도 말자고요.
왠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릴지도 모를 불안감이 들만큼 제게는 지금의 우리가 소중하거든요.

역시 부담백배 설정인가요? ㅎㅎㅎㅎㅎ

명진씨를 다시 만날 그날을 생각하고 기다리며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서 무척이나 마음과 정신이 산란합니다. 8월에 오시면 뭘할까요? ㅎㅎㅎㅎㅎ

아직 뭔가 구체적인 계획은 아니어도 기대하셔도 좋아요.
(역시 남자, 여자가 바뀐 맨트. ㅎㅎㅎㅎ뭐 어때요? 맨날 저만 이러지는 않겠지요? 절대 부담드리는 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ㅎㅎㅎㅎ)


내내 건강하시고 저는 내내 예뻐지려 노력해 보겠습니다. ㅎㅎㅎㅎㅎ

2016. 7.26. 멜리사 올림.


메일 가득 ㅎㅎㅎㅎ가 가득하다.

현영은 명진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사랑 그 이상의 감정이 명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희망과 기대라는 감정이다.

현영은 과거 자신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신의 인생을 바쳤던 거창한 사랑 안에서도 희망이라는 것을 품어본 적이 없었고 무언가를 기대해 본적이 없었다.


그저 지금의 것조차 사라질까 늘 긴장의 연속 이었고 더 나빠지지 않기위해 늘 마음에 차오르는 기대와 희망을 비워내고 덜어내야 했다.

그래야 그녀는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현영은 두 손 활짝 펴 모든 것을 내주었던 손을 최대한 움켜쥐어 보기로 한 것이다.


내 것이라고 부를만한 무언가를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그것이 명진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를 통해 꿈을 꾸고 상상하고 싶어졌다.

기대하는 대로 분명 움켜쥘 수 있을 거라고 믿지는 않지만 그저 꿈을 꾼다는 것만으로도 현영은 가슴이 벅찼다.


눈물이 차 올랐다.

그 어떤 원망도 자기 연민도 이제 현영의 발목을 붙잡지 않았다.

현영은 홀가분하고 무척 행복했다.

인생에서 꼭 사랑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이렇게 행복하고 가슴가득 찰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다.


그것은 그 어느 것 하나 자신의 것이 없었던 현영에게 인생이 가르쳐 준 최대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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