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태풍도 필요하다.

by 바다에 지는 별

"놀랐어요? ㅎㅎㅎ"

벌건 얼굴로 달려온 명진을 향해 희미한 미소로 현영이 말한다.


현영은 명진이 도착하고 한 동안 말없이 술을 삼켰다.

명진은 소량의 안주들을 여러 개 시켰고 현영의 앞 접시에 가지런히 올려 주었다.


현영이 하나를 먹고 나면 간격을 두고 하나씩, 하나씩...


현영은 네 번째 잔을 비우고 앞 접시에 놓이는 명진의 젓가락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ㅎㅎㅎㅎㅎㅎ명진씨!!!어미닭이 병아리 모이 챙겨 주시는 거예요? ㅎㅎㅎㅎㅎ"


"ㅎㅎㅎㅎㅎㅎ 아...그런가요? 그냥 빈 속인 것 같은데..좀 걱정이 되어서요. "


현영은 시선을 자신의 소주 잔에서 떼지 않고 가만히 명진의 손 등에 자신의 손을 얹는다.

눈물이 핑 돌아 고개를 들 수는 없어도 명진에게 자신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은 그녀의 표현이었다.

명진은 현영의 손 위에 다시 자신의 손을 얹고 현영의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현영씨!! 힘들어도 항상 첫 말문은 웃는 거...진짜 대단한 내공 아니면 안되는 거예요. 저는 그런 현영씨 모습 참 좋은데 마음 한켠이 많이 아프기도 하네요. 힘들 때는 그냥 울어도 되는데...폭 안아 줄 수도 있는데...ㅎㅎㅎ"


현영은 손을 빼내며 눈 가에 고인 눈물을 살짝 덜어내고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그 사람 내가 너무 미워했다는 거. "

현영은 말을 잇지 못하고 코가 빨개져 고개를 다시 숙였다.


명진이 건낸 손수건을 받아 들고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후우~~!!!!! 시기를 놓쳤어요. 그 때..정리할 때 악도 좀 쓰고 쌍욕도 자주 하고 그랬어야 했는데 너무 좋게 보내준 게 너무 화가 나요.


내가 ...내가...왜..그렇게 순순히 보내줬을까요? 나 이렇게 억울하고 화가 나는데?...왜..왜...


나한테 잘 못 보낸 문자를 보고 너무 화가 났어요. 미친새끼!!!! 우리 여보야..래...ㅎㅎㅎㅎㅎㅎ 한번도 나한테는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준 적도 없으면서..


네!!! 저 진짜 비참했어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런 감정 느끼는 나 자신이 너무 비참했어요. 나..바본가? 저 나쁜 놈은 저렇게 알콩달콩 잘만 사는데...나는 뭐냐고..뭐냐고...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어쩌면 저렇게 뻔뻔하고 뻔뻔한지!!!! 애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나? 나쁜놈!!!!! 아~~~!!!!!!!!"

현영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으며 낮게 신음했다.


"현영씨!! 아직 할 말 많잖아요..계속 해요. 쌍욕해도 되는데...ㅎㅎㅎㅎ 나 불편해요? "

현영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해요. 편하게 해요. 나 현영씨 어떤 사람인지 이미 다 아는 사람이니까 괜히 이미지 관리할 필요 없어요. 편하게 해요. "


".....진짜...나..그 새끼 죽여 버리고 싶어요....근데...근데...뭐라고 못 하는 건....내가 싫다고 딴 년한테 간 게 잘 못한건 아닌 것 같아요. 뭐야...이 바보 같은 소리는..에이씨!!!!


아니 아니...그건 아니지..아니지...

솔직히 나도 사랑한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눈에 들어온거라고, 내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했어요. 아!!!그게 뭐가 중요해..지금...


명진씨!!!나 안 취했어요. 근데 바보같은 말만 하죠? ㅎㅎㅎㅎㅎ"


"현영씨!!! 이유가 뭐가 되었든 현영씨가 기다리고 참아왔던, 기다렸던 그 시간을 분명히 그 남자도 알았어요. 그렇죠?


그런데도 안 아프고 멀쩡한 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사과도 받아야 하고 맞아도 할 말 없는 겁니다. 그런 걸 왜 현영씨가 자신에게 화살을 자꾸 돌립니까?


당당하게 전화해서 쌍욕하셔도 그 놈은 할 말 없는 겁니다. 아닙니까? 듣고 있는 저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왜 현영씨가 자책합니까? 현영씨가 뭘 잘 못 했습니까? 그렇게 외도하느라 바쁠 때 애들 곁을 지켰던 사람은 현영씨였잖아요. 그리고 지금도 애들 곁에 현영씨가 있어요. 그런데 쌍욕 좀 하면 안 됩니까? 왜 그렇게 자신한테만 뭐라고 하십니까? "


현영은 눈물이 주체가 되지 않는지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만 흔들린다.



"현영씨!!오늘은 제가 현영씨 위로해 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위로해 드릴 게 없어서요. 지금까지 잘 해 왔던 현영씨가 힘들어하는 건 옳지 않아요. 후회하지도 마시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얼음물 한바가지 좀 부어주고 오세요. 그러셔도 그 놈 현영씨 못 때립니다. 진짜 지가 남자라고 하면.."


현영은 퉁퉁부은 눈을 반 끔 가리고 명진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명진씨!!지금 화나신 거예요?"


"네!! 화 많이 납니다. 현영씨가 왜 그 딴 놈 때문에 힘들어해야 하는지 화가 납니다. "


현영은 명진의 꽉 쥐어진 주먹을 쥐어주며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감정표현이 확실한 분인지 오늘 알았네요. ㅎㅎㅎㅎ주먹을 그렇게 부르르 떠실만큼 화가 나신 건가요? ㅎㅎㅎㅎ"


"ㅎㅎㅎ 아!!제가 그랬습니까? "


"ㅎㅎㅎㅎ네!!! 이제 명진씨 앞에서 울지도 못 하겠어요. 명진씨 혈압 오를까봐. 주먹 펴봐요. "


손톱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하얗게 질린 명진의 손바닥을 현영이 쓸어주며 낮게 웃었다.

"고마워요. 명진씨!!! 이렇게 터트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어요. "


현영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떤 관계이든 시작이 있고 끝이 있지만 누군가에게 내 노력과 기다림이 부질없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배신감이란 건 진짜 참기가 힘들더라고요. 하지만...뭐...엄마, 아빠이기 이전에 우리도 남자, 여자니까 살다보면 다른 사람이 눈에 왜 안 들어 오겠어요? 내가 싫지는 않지만 나를 안고 싶지는 않다는 건 어쩌면 그 사람의 잘 못만은 아니죠.


그냥 여자로서 비참하고 슬펐어요. 그건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돌아선 마음을 아빠라는 이름으로라도 돌려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가 있는 사람과 한 공간에 같이 살 자신도 없었어요.


그냥 많이 슬펐어요. 제 자존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둘, 남녀 간의 인연으로 본 우리 사이가, 내가 그냥 많이 슬펐어요. 용서는 못 하겠지만 그렇게 편하게 정리가 되더라고요.


사실 정리할 시간이 없었어요. 이혼하고 아이들 챙기랴 계속 아이들 아빠와 정기적으로 봐야하는 상황에서 마음만 복잡하고 힘들어서 이렇게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앞에서는 서로 아빠, 엄마로서 잘했다고 얘기는 했지만 사실 많이 두려웠어요. 경제적인 지원이 있으니까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명진씨랑 얘기하면서 정확히 받을 건 받고 할 건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앞으로 서로가 편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자유로워질 것 같아요. "


명진은 현영의 퉁퉁 부은 눈을 바라보며 한결 부드러워진 눈으로 말했다.


"거봐요. 그렇게 정리도 금방 잘 하고 결론도 빨리 내릴거면서 왜 이제서야 저를 불러요? 좀더 빨리 좀 부르지. 그럼 그렇게 혼자서 맘고생 안 하잖아요? 다음부터는 좀 무슨 일 있으면 그때그때 좀 불평 좀 해요. 왜 그렇게 감쪽같이 아무일 없다는 듯이 지내냐고요? 앞으로 또 이렇게 한꺼번에 숙제 밀려서 오면 제가 술 엄청 먹고 주사 부릴 겁니다? "


"ㅎㅎㅎㅎㅎㅎㅎ명진씨 술 못 먹잖아요? "


"아시는 분이니까 앞으로 그러시면 어떻게 되는지 현실성 있게 확실하게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ㅎㅎㅎㅎㅎ"


현영은 명진의 이런 가볍지 않는 부드러움이 좋았다.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한...

따뜻하고 친절한 그의 깊은 마음이 고맙고 좋았다.


꽁꽁 닫아두었던 쓰레기 가득한 창고를 정리할 때의 막막함을 그대 덕분에 말끔하게 정리를 했네요...고마워요..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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