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제 너희들을 만나고 오면서 기도했어. '참 감사하다'라고. 우리가 이렇게 먼 곳에 오랫동안 떨어져 살다가 만나 볼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고마운지... 앞으로 또 언제 이렇게 만나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무척이나 신기하고, 감사하더라."
나는 6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그때부터 25살이 될 때까지 내 모든 생활과 가치관은 기독교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삶과 종교는 밀착되어 있었고, 그 시간을 같이 했던 친구들과 며칠 전 2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여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일요일 아침. 교회에서 집사 또는 장로의 자리를 맡고 있던 대부분의 친구들은 교회를 간다면서 좋은 주일 되라는 인사를 하며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고, 친구들은 내게 왜 너는 교회를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뜬구름 잡는 엉뚱한 소리를 대답이라고 한 것이 위의 맨트이다.
과연 친구들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들은 것일까? 그저 변명처럼 느끼는 것은 아닐까? 반신반의하며 나는 좋은 주말 보내라는 인사로 마무리를 하였다.
단톡 방을 나와 한 달 전부터 읽기 시작해 책의 막바지에 이른, '환속'이라는 책을 펼쳐 들었다.
초록색과 파란색, 여기저기 낙서한 것을 쭈욱 훑어본다.
"난 인위적인 기도는 안 합니다. 자고 깨어날 때 내 속에 이미 기도가 있어요. 요즘 이런 기도를 합니다. '육십 평생 잘못한 일도 많사오니 용서와 은총을 간구했었는데 너무 분에 넘치게 주고 계십니다.' 자다가도 감사기도를 많이 바치게 되었어요. 기도를 하면 사람들 눈에 안 보이는 것이 보입니다."
기도라...
서른 중반 즈음, 경제적인 어려움과 육아 등의 극심한 스트레스에 잠들 때면 늘 외로움과 가슴 답답함으로 시작된, 눈물 젖은 기도가 생각이 났다.
큰 아이가 두 살이 채 되기 전. 아이가 어리다 보니 교회 가는 것도 여의치 않아 집에서 혼자 예배를 드렸었고, 나중에는 신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나, 마음의 괴로움을 어찌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결국은 내 선택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의 신을 원망할 수도 없었고, 그분에게 신세한탄 같은 기도를 더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면목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서른 중반에 처음 술이라는 것이 내 인생에 등장하였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조용해진 집 안의 공기에 불도 켜지 않고 천천히 반 병의 소주로 하루를 마무리하였고, 나는 서서히 내 신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원망보다는 그저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아기를 보면 예쁘다는 생각 이전에 '이 아기가 이 힘든 세상을 어떻게 헤쳐갈까'를 걱정하는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저 먼 길을 가야 하니 얼마나 힘들까를 걱정했으니까요. 모든 사물을 슬픈 눈으로 비관적으로 봤던 거예요. 불행한 사람이었지요. 저 별들을 보면서 '내가 어느 별에서 왔을까'를 생각해보곤 했어요. 오늘 밤하늘에 별이 특별히 많네요. "
기도도 할 수 없었고, 내가 얽매여 온 기독교에 내 30년의 시간이 사기를 당한 듯한 생각에 분노에 휩싸인 시간을 살았다. 신은 없다고, 인생은 그저 혼자 견디는 것이라고 믿으며 체념 하 듯 어금니를 꽉 깨물며 살아냈다. 모든 게 공허했고, 허무했다. 그래서 그저 살아내는 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고, 책임이기에 삶 자체가 고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나도 위의 수녀님처럼 나는 인생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이고, 부정적이었다.
맨 정신으로는 견디기 어려워 자주 취했었고, 그리고 정신이 들면 다시 나가서 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면서 살았다.
지인들이 취한 눈빛이 무섭다고 했었다. 하지만 나의 30년 후반의 행보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공허하고, 한스러운 눈빛을 애처롭게 받아 주었다. 그들이 고마웠다. 그래서 그들에게만은 순한 눈빛으로 대하려 애를 썼고, 야수로 변하지 않으려 최대한 취하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그리고 직업상 낮은 곳의 사람들과 함께 하며 지내며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고, 人生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늘 답을 알지 못하고 질문만 해댔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나는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인가? 사람 아닌 다른 존재들의 존재 이유는 또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고요하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선명하고, 선명하면 드러나고, 드러나면 눈에 안 보이던 것들도 다 보여요.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타인을 향했고, 그리고 사물로 옮아갔으며 우주와 신으로 이어졌다.
"사지를 움직일 수 있는 건강이 주어진 것에 정말 고맙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오늘 일용할 양식이 있다는 것을 고마워하지 않더군요. 그리고 당당하게 돈 주고 샀다는 생각만 하나 봐요. 자연에 대한 기본 예의는 소식(小食)이에요. 먹을 만큼만 먹는 거지요. 사람으로서 가장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잠자리와 음식에 있다고 하더군요."
"흔히 하는 기도를 가만 살펴보면 모두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매달리는 기도가 대부분이지 않나요? 나도 전에는 그런 기도를 해왔었어요. 그러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해요. 나는 어쩌면 소속이 된 상태나 편안한 환경보다는 어려울 때, 그리고 산, 나무, 들, 꽃, 공기, 하늘, 바람, 벌레소리 같은 자연을 대할 때 기도가 잘되는 경향이 있더군요. 한없는 주님의 은총 한가운데 있는 느낌을 받거든요. 자신이 어려울 때 어떤 초월적인 힘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인간의 기본 본능이겠지요. 난 내 맘을 파고드는 간절한 기도를 대구 가기 전에 해봤고 여기 와서 다시 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내 안에서 이상한 힘이 솟아요. 그 희열이랄까, 그런 내면의 성령의 힘으로 사는 거지요. "
나는 아침 흙냄새가 그렇게 강렬한지 처음 알았다. 마음속으로 말없이 흙, 땅과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도 인간이 자연과 살아야 한다는 말은 자연이, 이 흙냄새가 우리를 정화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땅에서 와서 땅으로 가고 모든 땅에서 나는 것들 역시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니 우리는 곧 하나라는 결론을 얻었다.
지금도 상황이 달라졌거나 삶이 덜 버겁거나 하지 않다. 여전히 목까지 차오르는 숨을 깔딱대며 연명하 듯 삶을 살아내고 있지만 마음과 눈의 독기가 많이 빠졌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 대신 지금까지의 무탈한 삶이 기적이고, 그 기적 속에는 분명 신의 도움의 손길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녀님의 이야기처럼 나 또한 특별한 소망과 기원의 기도는 아니어도 가을 아침 출근하는 길에 만난 선선한 바람에서, 전선에 가려진 파란 하늘과 퇴근하는 길에 만난 노을 진 하늘에서 나는 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감탄의 기도를 올렸다.
감사하다고...
그 신은 하나님도, 부처님도, 알라도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바람 속에, 바라보는 하늘빛에, 무사히 하루를 잘 지내고, 내 아이들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시간 안에서 아주 가깝게 신이라는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우주 생명체 중 일개 인간에 불과한 내가 알아차릴 수 없는 그의 뜻 안에 나는 그저 포함되어 있을 뿐이라는 생각에 자주 잠겨 들었고, 그 모든 순리 안에 속한 나의 시작과 소멸이 두렵거나 불안하지가 않았다. 나는 안정되어 갔고, 인간의 삶과 생존이 조금 슬프고, 애달프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모든 생명체들에 대한 애착과 안쓰러움이 자리 잡게 되었다.
부족하고,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갈급함과 조급함이 사라졌고 어차피 내 것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사람이나, 삶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다. 소란스럽고 분주했던 마음이 고요해졌고, 가끔은 무중력의 진공상태가 되었다. 평화로워졌다.
그리고 나 스스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 고맙고, 감사하게 되었다. 내가 거저 받고 있는 이 많은 것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타인에게 아무리 사소한 배려나 친절도 당연한 것이 되어갔고, 내 눈빛도 순해지고 있었다.
나는 한 때 선교사의 꿈을 꾸었었다. 이 책을 엮은 이 또한 평생 종교와 밀접하게 관계하며 지내 온 사람이다. 내가 한 때 서원했던 그 길을 가지 않기로 했지만 내 인생에 신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신과 한 약속을 소박하게나마 지켜내려고 내 주변을 살피고, 적극적인 손길을 내밀면서 살았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늘 약속을 저버린 죄책감이 자리했고, 이번에 읽게 된 '환속'이라는 책에서 내가 가지 못 했던 길에 대한 죄책감과 동경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었다.
환속이라는 책은 수녀, 스님, 사제, 목사 등의 종교인이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로 세상 속으로 들어오게 된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종교, 신, 그리고 종교인이 종교계를 떠나 세상에 속해 살면서 또다시 재발견하는 종교와 신,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를 대화 형식으로 서술해 놓았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해답을 찾아 헤매는 이도 있었고, 더 넓은 신과 인생에 대한 지혜를 깨달은 이도 있었다.
사제였던 이가 했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복종과 순종의 차이를 아세요? 복종은 구속이지만 순종은 기쁨이에요. 신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질문과 이유가 적어지지요." "네, 강제와 자발의 차이군요."
"몸이 어디 있든지 간에, 신분이 무엇이든 간에 사회에서 학교에서 잘살던 사람은 수도원이나 공동체에 들어 가도 잘살고, 다시 사회로 나와도 잘 살아요."
결국 현재의 '지금 이 순간' 속에 성과 속이 같이 있으며 그 자체가 곧 성이자 속인 것이다.
자발적으로 자신이 몸담은 종교계를 떠났으나 그 누구 하나 그 결정을 후회하는 이는 없었다. 지나치게 성과 속에 대한 경계가 불필요하다는 그들의 공통된 이야기가 무척이나 가슴에 와 닿았다.
신은 교회와 절, 성당에만 계시지 않듯 세상 어느 것에서든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되는 마음의 눈을 갖게 된다면 그 어느 곳에 있든 만날 수 있으며 그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왠지 가슴 깊이 위로가 되었다.
혼자이지 않은 삶. 누군가의 관심과 손길 안에 늘 속에 있다는 것이 삶을 끝까지 살아내게끔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늘 무작위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 늘 경계하고, 자주 얼어붙어 날카로워지는 습관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 누군가는 사제의 옷을 벗고 동네 슈퍼 아저씨가 되었고, 어떤 수녀님은 그을은 낯빛을 한 시골 아낙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내가 만나는 그 무작위의 사람들 속에 그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들에게 순한 미소를 먼저 지어 보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나는 40 중반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야 나는 인생을 조금 알 것 같고, 삶이, 그리고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점점 깊어져 가고 있다. 좀 더 여유롭고, 따뜻하고, 깊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세상 속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며 날카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대상을 만나도 부드러운 바람처럼 유연하게 휘돌아 갈 수 있는 여유롭고, 기분 좋은 바람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