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보다가 닉 하나우어(Nick Hanauer)의 동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보는 내내 가슴이 뜨거워졌다. 박애주의나 혁명가가 아니라 상위 1%인 자신의 안녕을 위해 중산층과 하위층의 최저임금의 인상을 주장하는 그의 강연이 매우 진정성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강연의 제목이 이랬다.
"동료 부유층들이여 조심하라, 곡괭이들이 오고 있다."
며칠 전 월요일이라 민원창구는 매우 번잡했고, 진료 쪽도 연신 밀려드는 환자로 무척이나 정신이 없었다.
"야!!! 왜 없어? 그게 말이 돼?!!! 이 씨!!! 내가 높은 사람이었어봐, 니들이 이렇게 나 무시할 거야? 어?!!!"
자신의 휴대폰의 배터리가 바닥이라서 충전을 해야 하니 충전기를 달라고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출몰하는 악성민원이다.
안내와 민원의 소소한 다툼을 중재해 줄 청경 주사의 자리는 5개월째 비어있고, 맨 앞자리의 24살의 어린 공익 친구는 나이답지 않은, 굵고 우렁찬 목소리와 단호한 어투로 자신을 방어하고 있지만 저런 악성민원에게는 속수무책이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부탁할 일이면 정중하게 말씀을 하셔야지 왜 반말을 하냐고 격앙된 목소리로 대응했다. 그의 눈은 이미 광기로 평정심이나 이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이제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나 알지?!!! 어!!!"
나는 모른다고, 내가 왜 알아야 하냐고 앙칼지게 대답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데스크 안 쪽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재빨리 수화기를 들고 2층의 청경 주사의 관내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는 흠칫 걸음을 멈추더니 으르렁대며 욕을 했다. 그는 사라졌다.
예산 부족이라는 이유로 건물 안에 청경도 없이 5개월째 아들 같은 어린 공익과 이제 갓 입사한 여자 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3명이 하루 300명이 넘는 민원업무와 전화업무를 감당하고 있다.
대부분의 불만민원이 발생하는 업무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절차로 인해 발급이 거부되는 상황이다. 위임장 등의 절차로 없는 시간 내서 내방했으나 업무를 완료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짜증과 복잡한 상황에 대한 번거로움을 참지 않는다.
그래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들 같은 어린 공익 친구에게 민원들은 독설과 폭언을 일삼는다.
이 친구는 내가 발령받은 지 6개월 동안 이유모를 발바닥의 염증, 치아의 염증 등으로 여러 번 병가를 내는 상황이다. 짹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참아내는 그 몸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안 봐도 너무 짐작이 되어 따뜻한 물도 농을 섞어가며 마시라고 권해보고, 내가 먹는 싸구려 유산균도 먹여보지만 마음이 영 좋지를 않다.
그래서 항상 내 업무를 보다가도 상황이 심각해질 듯하면 중간에 개입을 해서 무마시키기도 하고, 같이 싸우기도 한다.
그렇게 전쟁 같은 업무가 끝이 날 때 즈음...
실무 보는 시간에 할 수 없었던 기록업무와 청구업무를 위해 야근 신청을 한다.
2개월 전부터 내려온 공문에는 야근 때 식사를 할 시에는 1시간의 야근수당을 제한다는 내용이 있었기에 18,000원 정도의 수당과 5천 원 정도의 식대를 비교해 저녁은 대충 위층의 주사가 챙겨 준 김밥 한 줄로 대신한다.
(EBS 지식e의 닉 하나우어 편 중 )
지인과 소주잔을 부딪히고 진한 알코올 향을 느끼며 꼴깍 삼킨다.
"크으!!!! 저요... '양육비 언제 줄 거야?' 이런 거 안 물어보고 살 수 있게 어디 한 400 주는 데 있으면 무슨 일이라고 할까 봐요.
10년 넘게 열심히 일해도 200 밖에 안 되는 돈 받아서 혼자 애 둘 키우는 게 말도 안 되고, 없다는 돈 달라고 맨날 애아빠한테 전화하는 것도 지겹고.... 뭐 없을까요?"
"그런 돈이나, 일자리 생기라고 최근에는 우리 야옹이한테 예명 붙여서 불러요. 사백아!!!라고요. ㅎㅎㅎ"
직장 동료가 그렇게 혼자 고생하지 말고 좋은 자리 있으면 소개해 준다고 했다. 애 둘 딸린 여자를 좋다고 하는 사람도 솔직히 조심스럽고, 그럴 사람도 없으니 괜히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호의는 감사하다며 거절했다.
큰 아이는 내년이면 고3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대학교를 어찌 보낼지 막막하고 답답해서 미리 복지센터에 전화를 해 서류를 접수했다. 돌아오는 답은 한부모 지원 사업의 3인 가정 연봉 기준에서 조금 높은 임금이어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영화 조커의 스틸컷- 네이버 검색)
지인이 꼭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두운 극장 안을 나와 화장실에서 거의 다 지워진 화장을 고쳤다.
며칠 동안 영화 후기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한없이 가라앉은 마음은 뿌연 스모그가 가득한 어두운 밤거리 같다.
영화 중 처음 눈에 걸려 온 것은 계단이다. 정신질환을 가지고 늙은 어머니를 부양하며 지내는 아서가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높은 계단. 그 장면을 보는 동안 나는 숨이 막혔다.
(영화 조커의 스틸컷- 네이버 검색)
저 계단은 끝없이 미래가 보이지 않아 숨 막히는 아서와 나의 삶처럼 느껴졌었다. 아서는 살인을 하고 내려오면서 저곳에서 춤을 추었었다. 노모를 부양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에서 놓이고, 정신질환자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정상인인 척하며 살아야 했던 자신의 모습에서 자유로워진 그가 추는 자유의 춤.
선악의 판단을 떠나 그가 춤을 추면서 짓는 표정은 아서의 영혼 저 밑바닥에서부터 환하고 아름다운 꽃들의 봉오리들이 터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없이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행복해하는 아서의 모습이 나는 안쓰러웠다.
영화에서는 벤데타의 가면(광대 얼굴의 가면)이 영화 전반에 걸쳐 자주 등장한다.
가면...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썼던 그 가면. 그들은 그저 평범한 중하층민들이었다. 그들이 가면을 쓰자 자신 안의 분노를 터트리고, 부자들을 공격하는 폭도로 바뀌었다.
나는 그 장면에서 최근 모항공회사 직원들이 저들과 같이 얼굴을 가리고 시위를 했던 뉴스가 생각이 났다. 가면 뒤에 숨는 것. 그것을 그저 비겁함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힘없고 약한 사람들일수록 정면에 나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왜냐하면 간신히 먹고사는 지금의 불안한 그 자리마저 빼앗길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영화와 뉴스 속의 사람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받았던 부당한 처우들을 참아내며 앞도 보지 않고, 오롯이 자신과 자신의 주변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그저 순박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왜 거리로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격하게 공감했다.
그리고 그들은 토마스 웨인 같은 슈퍼리치들을 살해하고 공격한다. 가면 뒤에 자신의 얼굴 숨기고 터트리는 분노에 칼과 총은 피의 춤을 춘다. 위험한 생각이지만 나도 저 가면 뒤에 숨어서 저들 속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영화가 상영될 때 모방범죄가 우려되어 경찰까지 동원되었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만큼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삶에 지쳐있고, 그 인내심과 평정심은 한계에 와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으리라.
점점 나아지는 게 아니라 더 힘들어지고, 숨이 막혀오는 상황에서 그 누가 화가 나지 않을 것이며 올바른 정신을 부여잡고 살 수가 있을까?
그래서 매일 마주하는 다수의 민원들은 화가 나있고, 작은 일에도 분통을 터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하다고 해도 솔직히 그들을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약한 자가 더 약한 자를 괴롭히고, 물어뜯으면서 사는 정글 같은 지금의 인간사회가 너무 처절하고, 슬플 뿐이다.
나는 극 중 데브라 케인이라는 인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정신질환자들을 상담해 주는 일을 한다. 어느 날 시의 복지정책이 예산 부족으로 무료 상담과 서비스가 중단된다고 말하자 아서가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어했던 그녀를 비난한다. 그러자 데브라 케인이 소리치며 말한다.
아서가 말했듯이 그의 인생에, 그의 이야기에 관심 없다고, 궁금하지 않다고.
아서는 그녀가 사무적인 태도보다 좀 더 상냥하고, 관심을 가져주길 원했을 것이다. 정신이든, 몸이든 어딘가 아파서 오는 사람 들인 만큼 적정선에서 조심히 다가서야 하고, 적당한 따뜻한 친절은 필요하지만 그녀가 왜 그렇게 아서에게 당당하게 소리쳤는지 나는 이해가 되었다.
그녀가 하고 있는 그 일은 자신의 직업일 뿐이다. 자신의 업무에 어느 정도의 직업의식은 필요하지만 의료직이나 서비직은 그 어떤 직종보다 강도 높은 감정노동을 강요받는다.
그들은 한 개인이지만 그녀와 내가 하루에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엄청난 숫자인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1980년대나 지금이나 적정 수준의 노동을 위해 충분한 인원으로 업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대한의 업무를 보는 구조가 다르지 않으리라고 본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이 본업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일보다 부정적인 에너지를 한 두 사람도 아닌, 다수의 여러 사람에게 받는다는 것은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는 어쩌면 감당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양적으로, 질적으로 엄청난 감정노동과 그에 상응하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온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받는다.
과연 한 달 급여로 그에 응당한 대가를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녀와 나에게 요구하는 영혼과 진심을 담아 서비스를 해 달라는 요구가 과연 당연한 것일 수 있을지...
(영화 조커의 스틸컷- 네이버 검색)
아서의 어머니는 그를 Happy(해피)라고 부른다.
평소에 행복이란 단어를 생각해 보면 참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물론 각자 행복을 느끼는 지점은 다양하겠지만 말이다.
행복해지고 싶은 아서 어머니의 소망이 담겨 있는 듯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서는 단 1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닉 하나우어의 강연과 '조커' 영화에서 강조되는 것은 추상적인 행복이 아니라 삶, 생활이다.
대단한 사람이 되어 행복하게 살기 위한 지침서나 영화가 아니라 그저 먹고살면서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향해 있다는 부분에서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러면 닉 하나우어와 영화에 다뤄지는 그 중하위층의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좋은 집과,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싶은 것인가? 아니다. 그저 내 아이를 교육시키고, 굶주리지 않고, 미래까지는 아니어도 절망은 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결코 상위 1%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다.
그 먹고사는 일, 즉 생계가 위협받을 때 어떤 사람이 분노의 곡괭이를 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죽어라 일을 해도 먹고살기 힘드니 야근을 하고, 투잡을 뛰어도 상황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제자리걸음이라고 하면 작은 일에도 누가 분통을 터트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래서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모두 화가 나 있다. 작은 일에 분노하고,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며, 잔인하고 맹렬하게 짖어대는 야수처럼 폭언을 서슴지 않는다.
닉 하나우어가 노동자들의 적정 최저임금으로 주장했던 15달러.(한화 약 17,000원) 그렇게 한다고 해도 한 달에 한 사람이 300만 원을 받지 못한다.
요즘처럼 나 같은 싱글맘, 싱글대디들은 두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고, 먹이고 입히는 일 조차 제대로 될 수가 없는 돈이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우리는 행복한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저 아이들과 먹고살 수 있는 지금이길 바라고, 어렵고 힘든 부분을 가면 뒤에 숨지 않고 당연히 요구할 것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지금을 살고 싶은 것이다.
지금 당장은 좋아지지 않더라도 조금씩 나아지는 현재를 보며 지금을 참을 수 있고, 기다려 볼 수 있는 가치를 느끼면서 내일의 삶을 이어가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