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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지는 별 Nov 12. 2019

우리 엄마한테 내 딸을 일러바치다

편지글

어머니...
늦가을비가 촉촉하니 좋은 밤입니다.
식사는 하셨는지요?
오늘 하루는 무엇을 했는지 물으셨지요?
저는 오늘 일요일 아침 8시에 눈을 떴습니다.  일어나 아들 녀석 피시방 출근시켜 드리느라 이른 식사를 챙겨 드렸습니다.  잠시 커피 한 잔을 한 모금하는데 늦가을에 먼지 가득한 선풍기가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잔을 놓아두고 나사를 풀어 분해하고 속 먼지까지 청소기로 빨아내니 여름 내내 북극곰 같이 뜨거운 피를  가진 아들 몸의 열기를 식혀내느라 격무에 시달렸을 선풍기의 노고가 새삼 고마워졌더랬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깨끗한 수건을 꺼내 물에 적셔 먼지 가득한 몸체를 닦아 주고 검은 비닐봉지에 고이 입관하여 1년이라는 휴가를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한 숨 돌리려는데 큰 녀석의 기척이 들렸습니다.  문을 열고 아침 문안인사를 드렸습니다.  누워서 굿모닝을 외치시더군요.  


지금 현재 고2인 녀석에게 한 달 전부터 책꽂이에 정리가 안 된 중학교 책들을 정리해 주십사 부탁을 드렸으나 요지부동 하시어 오늘은 기필코 미뤄둔 업무를 완수하고픈, 통통하고 원대한 꿈을 꾸고 기회를 엿보았더랬습니다. 녀석은 밤새 꽉 찬 방광을 비우고 오시더니 아니나 다를까 컴퓨터를 켜시더군요.  
미리 정중히 부탁드렸습니다.

"공주님!! 이따가 제가 청소기를 밀어 드려야 하니 이불만 좀 고이 접어 책상 위로 올려놔 주시겠습니까?"

거만하게 그리하겠다고 하시더군요.

잠시 언니야님이 싸주신 거대한 박스를 베란다 창고에 정리를 하고 오니 게임 속에 물아일체가 되어 계신 녀석에게 조심히 다가가 속삭였습니다.

"지금!!"




당연히 지금 해 주시지는 못 할 걸 알았지만... 그래도 소심하게나마 저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해 보았습니다.  역시나... 10분이 훨씬 지나서야 고매하신 엉덩이님을 의자에서 떼어 주시더군요.  
 
이불을 정리하는 등 뒤로 조심히 예전부터 책장 옆에 먼지와 함께 쌓여 있는 책을 가리키며 "저것을 치워드릴까요?"라고 물었더니 고맙게도 허락을 해 주시더군요.

그리고 좀 더 용기를 내어 그 옆의 커다란 바구니 안의 용도 모를 것들을 정리해 드려도 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먼저 서너 개의 에코백부터.
무엇을 안 쓰시는지 여쭙고 바구니 정리를 하고, 후다닥 바닥 청소를 하고 이쁘게 이쁘게 이불을 다시 펴 드렸습니다.
물론 잊지 않았지요.  감사의 인사.

"바쁘신데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 니이임!!!"



어머니...
딸년 교육 잘 시킨다며 상한 마음에서 하실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어머니...
휴일 아침 다락방에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며 살림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죽은 척  숨소리조차 조심스럽게 내던 중학교 2학년의 제가 떠올랐습니다.  비록 어려운 살림에 겨우 밥 먹고 살았지만 화 한 번 내시지 않고 혼자 묵묵히 집안일과 살림을 하셨던 어머님의 그 수고로움과 희생으로 저는 곱게곱게 별로 손에 물 몇 번 묻히지 않고 살았으니 저 또한 제 딸년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어머니..

제가 그렇게 어머님처럼 제 딸년을 곱게 키우고 있지는 않습니다.  주말에 빨래 정리와 설거지는 당연히 자신의 몫임을 잘 주시켜 놓았으니까요.  


그나마 저는 제 딸아이보다 좋은 어머님을 만나서 더 호사스럽게 살았다고 하면 조금 기분이 나아지실까요?

세탁기에 돌린 빨래를 세 번쯤 하고 있을 때 딸이 배가 고프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베란다 청소와 집안 청소, 여름 용품 정리와 세 번의 빨래를 널고, 운동화까지 빨고 난 다음이라 저도 너무 배가 고팠지만 왠지 일하고 있는 제게 해맑은 얼굴로 "배고파!!"를 외치는데 좀 서러웠습니다.
갱년기 탓이겠지요.  

네.. 어머니... 저도 이제 곧 50이니 갱년기가 올 때도 된 것이려니 하지만 수시로 오르는 열로 온 몸은 땀이 범벅이고 이렇게 별 것도 아닌 일에도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두 번의 밥상차림이 시작되었고, 아침에 아들 녀석이 남겨 주신 김칫국에 밥을 데웠습니다.  귀한 따님의 반찬으로 계란 프라이와 햄을 구웠지요.  그런데 아까 그 얄미운 "배고파!!"가 생각나서 그냥 김칫국에 후루루 밥 말아서 퍼먹으려다가 오늘은 맘을 고쳐 먹고  저도 계란 프라이 두 개를 했습니다.


어머니... 기억나십니까?
한 번은 식은 밥 한 덩이조차 아깝다며 물 말아서 드시는 어머니에게 "그 한 덩이가 뭐라고... 버리고 새 밥 드시지..."라며 핀잔 비슷한 말을 했었던 저를 말입니다.
웬 청승이냐는 뜻이었리라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두 아이의 어미가 되어보니 자식이 좋아하는 것은 한 개라도 내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자식에게 오롯이 들어가는 걸 보는 게 본능처럼 각인이 되었는지 지금은 흔해 빠진 계란 한 알조차 저의 입 속에 넣는 것이 어색해지곤 합니다.

저는 두 녀석이지만 어머니는 네 명이었지요.  그러니 그 한 덩이의 식은 밥의 의미는 저의 계란 한 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의미였으리라고 지금 생각해 봅니다.


식사를 마치고 딸아이는 고맙게도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하고 살포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문을 닫고 들어간 딸은 참 시끄럽습니다.  무슨 게임을 하시는지 외래어에 이상한 괴성까지....


제목-개진상 (출저-네이버검색)

어머니...
여기는 제 집인데 저 아이는 너무 시끄러워 불편합니다.  헤드셋을 끼면 자꾸만 사람이 내는 소리 같지 않은 괴성을 질러댑니다.  가끔은 제가 아는 지구인 딸이 맞나 의심이 들어 살포시 공주님의 방문을 열면 돌아보지도 않는 딸아이의 등만 바라보다 쓸쓸히 방문을 닫습니다.



마지막 빨래를 건조대에 널고 청소기를 돌렸습니다.  물걸레질은 도저히 할 힘이 없어 그만두기로 하고 잠시 아침에 한 모금 마시다 올려놓았던 식은 커피를 가져와 한 모금 마시는데 저의 발바닥은 흙바닥을 돌아다닌 양 새까매져 있었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발을 닦고 몸살기가 느껴져 이불을 펴고 죽은 듯이 잠을 잤습니다.  2시간이나 흘러 있었고 어느덧 해는 저물어가고 있는지 집안이 살짝 어두웠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조금은 익숙한, 그러나 결코 좋아질 리 없는, 외계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 딸이 살아 있구나...'


대충 머리를 묶고 딸의 방문을 열어 배가 고프신지 여쭤 보았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하십니다.
뭐가 드시고 싶으시냐고 하니 "맛있는 거"라며 메뉴 선정에 전혀 도움도 되지 않는 야멸찬 답을 하십니다.

떡볶이와 구운 만두, 그리고 소시지 떡 튀김, 사과를 곱게 깎아서 시간 맞춰 피시방에서 퇴근해 주신 아들과 딸과 둘러앉아 맛있게 먹었습니다.  

어머니...
저는 다소 예민하고, 잘 토라지지만 정스럽고, 사랑스러운 딸과 이렇게 주말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저는 자주 어머님을 떠올립니다.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집안일과 자주 아프셨던 아버지를 대신해 갖은 행상까지 하셨던 어머님.

그래서 억척같았고 욕도 잘하셔서 동네 호랑이 아줌마로 통하셨었지요.  밤새 장사하고 죽음과 같은 잠 속에 빠져 있을 때 들려오는 아이들의 고함소리는 무척이나 짜증스러우셨을 테지요.

저 또한 어머님만큼은 아니어도 억척같이 직장생활을 하고 새끼들을 키우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어리고 철없는 자식들이 가끔 티브이에서 그러지요.

 '자식을 낳았으면 당연히 먹이고, 입히고, 교육을 시키는 거지, 그걸 왜 생색을 내?'

저의 딸은 저 정도로 막 돼먹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식을 낳아 먹이고, 입혀보지 않은 그들의 당연한 해맑음이 못된 성깔에서 나온 말이겠지요... 노엽고, 서운한 말이기는 하지만 제가 어머님의 식은 밥 한 덩이의 청승을 비난했듯 한 어미의 어린 딸들은 잘 몰라도 되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며 쓴웃음 한 번 지어 봅니다.

호사가 별 거인 가요?

밤새 못 자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과 몸을 쉬지도 못하고 밥상을 차리고, 도시락을 싸주었지만 그 누구도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않았던 자식 네 놈들.  
세탁기도 없던 시절 늦은 밤 우물가에 앉아 커다란 빨간 대야에 빨래판을 넣고 희미한 백열등 아래 빨래를 비벼대고 철썩철썩 큰 아들 녀석의 바지를 헹궈댔지만 그 누구도 일어나 어머님의 빨래를 도운 자식은 없습니다.
그저 곁에 있어야 할 엄마가 없어 팬티 바람으로 엄마 냄새를 찾아 등에 찰싹 붙어있던 막내인 저만이 어머님의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훌쩍임을 들었을 뿐입니다.

어머니...
어머님의 그런 호사 속에 우리가 컸습니다.

어머님이 묵묵히 참고 넘기시던 그 인내심으로 지금의 제가 속 깊은 딸이 되었듯이 저의 어린 딸도 그런 저의 인내심을 먹고 어른이 될 것입니다.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머님의 든든한 딸로 잘 컸듯이 저의 어린 딸도 그리 될 것이라 믿으니까요.  

어머니...
휴일 저는 쉬지도 않고 집안일에 바쁘게 지내는데 저의 어린 딸이 빈둥대는 모습에 솔직히 짜증이 나서 어머니에게 딸을 일러바칠 심산으로 글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쓰고 보니 제가 일러바칠 만큼 잘한 것도 없는 딸이었다는 기억만 회상하게 되었네요.

어머니...
밤이 깊었습니다.
비가 온 뒤라 곧 바람이 차가워질 테지요.
옷 따습게 챙겨 입으시고, 내내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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