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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지는 별 Jun 19. 2023

살아가는 일도 큰 꿈이다.

심리상담사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 4

선생님.. 굿모닝입니다.

주말에 텃밭에서 첫 감자를 수확해 감자샐러드를  만들었어요.  

아침에 출근해 샐러드빵을 해서 직원들과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성가시고, 주변에 까만 머리들이 모여 있는 것만 봐도 스트레스가 쌓이던 제게는 큰 변화겠거니 생각하니 참 기분이 좋더라고요.

 텃밭에 해바라기도 예쁘게 피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통통하니 귀여운 호박벌 손님이 찾아왔어요.  

이 또한 어찌나 정겹고, 사랑스러운 만남인지.... 한참을 들여다보면서 동영상도 찍고, 사진도 마구마구 찍었더랬습니다. ^^



어제는 모처럼 지인을 만나 술 한 잔 했네요.  평소 남편과 늘 이혼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으로 엄마와 아내로서만 살고 있는 그 친구는 과거의 저처럼 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이 독립함과 동시에 본인은 이승에서의 책무를 다 했기에 그 시간에 맞춰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겠다고 했어요.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자신의 책무를 다 했으니 미안하다거나, 아이들이 슬퍼할 것에 대해서는 자신은 관심 없다고 하는데 과거에 저의 모습과 토씨하나 틀림없이 똑같은 말에 웃으면 안 되는데 피식 웃고 말았네요.

 

지인의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에 저도 정형화된 답만을 이야기하면서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들도 이런 마음으로 이야기했겠구나....라는 생각에 콧등이 시큰해져 왔습니다.  그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틀에 박힌 사람들의 말을 다 튕겨버리던 저의 오만함과 자만심을 깊이 반성하고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지인들에게 마음깊이 사과의 말을 혼자 읊조렸습니다.  

어떤 좋은 말로도 그 사람의 마음을 돌려놓지는 못할 것 같아서 그 어떤 의도도 내려놓고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인생이 선생님의 것이라는 건 맞아요.  그리고 지금 우울하고, 힘든 건 선생님의 잘못도 아니고요.  그런데요... 어차피 선생님이 죽기로 마음먹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도 조금 생각해 보세요.  하루를 살아도 즐겁고, 기쁘게 살다 가는 것도 꽤 괜찮아요.  매일이 지옥인데 10년 넘는 시간을 어떤 희망도 없는 지옥을 반복하기보다 하루만이라도 숨통이 트이고, 표정이 확 풀리는 그런 날도 있어야 10년을 참는 일이 좀 편하지 않겠어요?  저도 상담받고, 약 먹어보니 '아... 이런 날도 있구나. 나한테.... 세상이 이렇게 달리 보일 수도 있구나..'그랬어요.  선생님도 어차피 죽을 거니까 죽을 땐 죽더라도 조금 가벼워지는 것도 꽤 괜찮을 것 같아요.  "

말하고 보니 이 또한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였지만요...


선생님...

상황이 바뀌는 것도 우울감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마음이 바뀌니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이 바뀌더군요.  그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매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허전한 그이를 보면서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언젠가는 술이 안 먹고 싶어지고, 술이 없어도 마음이 꽉 차는 날이 올 거니까 먹고 싶을 땐 먹어도 괜찮다고 말해 줬습니다.  콧등도, 눈시울도 빨갛게 해서는 비워내는 소주잔을 보면서 저 또한 그이와 같은 시간을 보냈던 저의 모습과 겹쳐져 함께 눈시울이 붉어졌더랬죠.

매일매일이 재미없고, 시시하고, 지겨운데 10년을 살아내기로 결심한 그이도 대단한 거겠죠?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는데.... 지금에서야 생각이 나네요.  ㅎㅎㅎ

 

20대 때는 큰 꿈이 있었어요.  그런데 별 볼일 없는 남자 만나서 그런 꿈도 접고, 먹고사는 일에 목숨 부지하고 대롱대롱 매달려 살아가는 제 삶이 너무 남루해 보였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목숨 부지하고 사는 일도 결코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매달 적은 월급으로 알토란 같은 내 새끼들을 이렇게 키워낸 스스로가 무척이나 대견해 보이더군요.  꿈이라는 게 이타적인 것만이 가치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해 봤네요.  삶이 목표가 되어도 그 또한 치열한 전쟁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늘 아침 산책길에 공원의 나무들을 정리하느라 무척 소란스러웠어요.  빠르게 잘려나가는 가지와 나뭇잎들로 강한 피톤치드를 발산해서 공원 안이 한가득 향기로웠어요.  덥고 습한 날씨지만 향기로운 산책시간이 참 좋았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빌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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