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퇴사하기로 했어.”
전화기 너머 원희의 목소리가 서글펐다. 나는 원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잘했다고 해야 할지, 왜 그랬냐고 해야 할지, 좀만 더 참아보지 그랬냐고 해야 할지. 잠깐의 고민 끝에 꺼낸 말은 ‘고생했어’였다.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은 ‘넌 좋겠다’였지만.
원희는 나의 대학 동기다. 그녀는 좋은 대학에 다녔고, 학점도 좋았다.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와 영어도 꽤 잘했다. 부족한 것 없는 고스펙의 취준생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은 너무 많았다. 눈물로 서류 탈락 소식을 듣는 날이 많아졌다. 한 학기 먼저 졸업 후 대기업에 취업했던 나는 밥을 사며 원희를 위로하곤 했다.
“내가 너보다 덜 성실하진 않았잖아. 근데 왜...”
어떤 날 원희는 나와 대화를 나누다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하지만 원희가 흘려버린 그 말이 내 귀에는 선명히 들리는 듯했다. 대학시절의 나는 밤새 술 마시고 밥 먹듯이 수업을 빼먹는 학생이었다. 성실하게 살아온 그녀의 눈에는 ‘왜 내가 아니고 네가 그 회사에 갔을까’ 억울했을 것이다. 나는 원희의 뾰족한 마음을 받아주었다. 나 또한 불과 몇 개월 전까지 멘털이 산산조각 난 취준생이었으니 그녀가 느낄 억울함도 이해가 됐다. 얼마나 힘들면 그럴까. 그럴 수 있지. 오히려 뾰족해진 원희가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더 비싼 밥을 샀다.
얼마 후 원희는 드디어 취업에 성공했다. 바라던 회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중견 식품 회사였다. 입사의 기쁨에 빠진 것도 잠시. 원희는 회사 생활을 무척 힘들어했다. 그녀는 지독한 사수를 만났다. 평생 모범생으로 살아온 원희에게 숨은 그림 찾듯 부족한 점만 찾아내 지적하는 사수는 견딜 수 없는 존재였다. 써가는 보고서마다 퇴짜였다. 야근이 계속 됐다. 상사의 무자비함. 혹은 스스로의 부족함. 그것들이 원희를 괴롭혔다. 원희는 그때마다 울면서 내게 전화했다.
뾰족하던 원희의 마음이 완전히 뭉그러져 약해졌을 때, 나는 그 마음을 받아주기가 힘겨웠다. 원희가 9시까지 야근하느라 힘들었다며 투덜거렸을 때, 나는 새벽 3시에 사무실을 나섰다. 사수에게 또 혼났다며 원희가 울음을 터뜨렸을 때, 나는 6개월째 사수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퇴근길마다 투정 부리는 그녀와의 전화를 끊고 나면 나는 오직 차에 치이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그 정도도 못 참아?’라는 꼰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원희와 나의 상황을 저울질했다. 이론적으로는 그러면 안 되는 거였지만, 실전의 내 마음은 달랐다. 스스로가 참 못났다고 느꼈다. 그래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인정해야 했다. 나는 못났다. 나는 못난 친구다. 그게 날 또 힘들게 했다. 더 이상 원희를 위로할 수가 없었다. 마음에 없는 위로를 짜낼 에너지조차 없었다. 나는 그냥 견뎌내고 월급을 받아가야 했다. 당장 한 달만 쉬어도 가족의 생활이 쉽지 않았다. 그렇다. 난 견뎌야 했다.
“이건 견딘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아.”
퇴사 소식을 전하던 원희는 이 말을 덧붙였다.
“견뎌야만 하는 사람도 있어.”
나도 모르게 뾰족해진 말을 툭 던졌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견디지 않아도 되는’ 원희가 부럽고 미워서 해버린 말이었다. ‘내 힘듦이 너보다 깊다. 나는 그럼에도 견뎠다. 나는 위대하다. 넌 견디기 싫으면 견디지 않아도 될 여유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라’ 따위의 오만하고 부끄러운 생각들을 뒤섞고 뭉쳐서 던져버린 말이었다. 원희는 당황했다. 찰나의 침묵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수습했다.
“아무튼 고생했어. 그래, 이 참에 좀 쉬면서 운동도 하고. 우린 언제 볼까?”
우리가 다시 본 건 아주 한참이 지나서였다. 나는 계속 회사 일로 바빴다. 원희는 퇴사 후 곳곳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여러 취미 활동도 시작했다. 원희는 당분간 재취업을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회사라면 이골이 난다고 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수록 ‘이골이 나는 회사’에서 계속 ‘견뎌야만 하는’ 스스로가 너무 싫었다. 원희는 해버린 ‘퇴사’를 하지도 못하고, ‘해외여행’은 한 번도 떠나보질 못하는 내가 너무 불쌍했다. 내가 불쌍하게 느껴질수록 원희가 점점 미워졌다. 가장 친한 친구를 미워하는 나는 또 한 번 세상에서 가장 불쌍해졌다.
나 자신을 불쌍해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원희를 마주하는 일이 너무 두려웠다. 아까도 말했듯 우리가 다시 본 건 아주 한참이 지나서였다. 점점 만나는 텀도 길어졌다. 우리는 멀어졌다. 나는 그녀를 멀리 했다. 불쌍한 내 모습과 멀어지고 싶었다.
지금 나와 원희는 생일마다 서로 안부를 묻고, 1년에 한 번쯤 만나서 논다. 원희는 전업주부가 되었고, 나는 12년 차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 서로에게 뾰족한 말을 던지던 시간은 멀리 흘러갔다. 평화의 시간이다. 원희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문득 지나간 나의 얼굴이 보인다. 비싼 밥을 사주며 원희를 가여워하던 오만한 얼굴. 원희와 나의 불행을 저울질하던 못난 얼굴. 견디지 않는 원희를 짙게 미워하던 불쌍한 얼굴. 나는 그런 얼굴들을 원희에게 보여줬구나. 나는 그런 얼굴을 하고 살아왔구나. 나는 조용히 그 얼굴을 한 번 더 깊이 응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