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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Mar 15. 2019

운수 좋은 날

앞에 두고도 왜 먹지를 못하니

배불러

사실 평소에도 밥 먹고 나면 항상 하는 말이라 대수롭지 않았을 것이다. 잠깐 같이 걸을까? 하는 말에 쇼핑몰을 활보하며 여기 어때? 저기 가볼까? 하며 불려놓은 배를 풍선 바람 빠지듯 만드는 건 내 전문이니까.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한 시간 정도 걸어 다니던 내가 더 이상 못 걷겠다며 서점에서 의자에 앉아버린 것. 그렇다. 오늘은 배부른 게 아니라 체한 것이었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출근하고 평소보다 늦은 지하철을 타게 되어 급행을 탔다. 안 그래도 어제 들고 온 노트북으로 손도 여유롭지 않은데 때마침 찾아온 꽃샘추위에 아직 다 떨어지지도 않은 코감기가 걱정돼 패딩까지 입고 나온 날이었다. 아침부터 정신없음의 연속이었다. 업무도 미팅도. 때마침 적어내라는 업무 보고엔 내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한다고? 내용이 적혀있었다.


아니야, 생각해보니 어젯밤부터였어. 오랜만에 글을 올린답시고 집에 뻑난 노트북을 대신해 회사 노트북을 들고 나왔고, 알 수 없는 피로에 지하철에서 입까지 벌리고 졸았던 것 같아. 그리고 엄마표 김치찌개도 과식했고, 밤늦게까지 게시글을 올리고 인스타그램을 켰는데 알 수 없는 오류가 떴다. 오늘 아침쯤엔 해결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더 심해진 걸 보니 내 계정이 해킹되었나 의심했다. 그렇게 신경이 점점 곤두서 있었나 보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저녁 식사를 했는데도 배부름이 아니라 체기가 돌았을 수밖에. 무리한 거 아니야?라고 묻는 남자 친구 말에 아니야,라고 대답하면서도 내심 미안하다. 어쩌면 네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욕심낸 거 같아 미안하고 또 미안해.


그렇게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남자 친구가 집에 가고 나 역시 집으로 돌아온 뒤 4시간 후, 이제는 좀 괜찮은 거 같다.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어지러운 걸 보니 급체도 아니고 좀 오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입맛이 돈다고 급하게 많이 먹긴 했는데 그럼 그렇지. 봄이 온다고 시기하는 꽃샘추위처럼 컨디션 좋다고 시기하는 불청객들이 찾아온다. 이럴 때일수록 저질 체력 믿지 말고 잘 쉬고 잘 먹어야 하는데 너무 자만했나 보다. 어지러워서 그런가, 쏟아질 것 같던 잠도 안 오고 조금 괴로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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