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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 Jul 12. 2019

엄마의 버킷리스트를 함께 하는 날

벌써 7월이 되었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자 거짓말처럼 엄마와 나는 같은 이야길 시작했다. “우리 작년 이맘때 유럽에 있었는데.”

백수로 집에서 빈둥거리며 숨겨놓은 비상금까지 야금야금 다 써가는 초여름 밤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 텔레비전에서는 동유럽으로 떠난 여행가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엄마는 그날도 입버릇처럼 나도 죽기 전에 저런 곳 가볼 수 있을까? 라며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문득 이탈리아 여행에서 만났던 모녀가 생각났다. 그리고 홀린 듯 비행기 티켓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엄마 프라하 인-아웃으로 검색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해 우리는 그날 밤 동유럽 여행 패키지를 예약했다.

막상 예약까지 마쳤지만 엄마도 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엄마랑 단둘의 여행은 처음이었고 여행을 떠날 때 엄마의 모습을 알고 있었고, 나의 여행 스타일과 얼마나 다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설렘보단 걱정이 더 컸다. 게다가 혼자 떠났던 이탈리아 여행이 생각보다 힘들었던 기억이 나서 엄마에게 겁을 많이 줬다. 소지품을 잘 챙겨야 한다, 유럽은 소매치기가 너무 많다는 둥, 영어가 통할까? 날씨는 좋을까? 등의 걱정을 안고 동유럽으로 향했다.


하지만 프라하로 향하는 비행기에서부터 조금씩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별 탈 없이 무사히 여행이 끝나길 기대하며 어찌어찌 프라하 공항에 도착했다. 그렇게 우리는 패키지여행답게 큰 리무진 버스를 타고 프라하에 도착한 지 3시간 만에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째 날이 시작되자마자 할슈타트와 잘츠부르크 관광을 하며 엄마의 쇼핑력이 발동해 자유시간 내내 정말 알차게 뛰어다녔다. 시간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라고 가르치던 우리 엄마는 자유시간을 즐기다 일행들과의 약속 시간에 늦어버렸다. 휴. 그렇게 싸움이 시작됐다. 엄마는 내 눈치를 보고 나는 엄마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서 그 날 저녁, 노을이 아름답던 오스트리아 산속 호텔에서 결국 우리는 대차게 싸우고 말았다. 나는 엄마를 배려하고 보호하려 했던 행동들이 엄마는 내 눈치로 여행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싸우다가 문득 창 밖을 본 엄마는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짜증을 냈다. 결국 화해 겸 손 잡고 뛰어나가 땅거미가 진 호텔 구석구석을 걸어 다녔다. 그날부터 우리는 우리 각자의 여행을 존중하기로 했다.

사실 존중이라고 하지만 그냥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것이었다. 엄마가 더 보고 싶다고 하면 따라가서 통역을 하고, 혹시 소매치기라도 당할까 소지품 잘 챙기라고 잔소리 조금 하다가, 같이 사진도 남기며 엄마의 여행을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엄마는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여행을 하며 엄마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발견했다. 평화로운 풍경을 보며 신나 하는 소녀 같은 모습도 있고, 오랜 이동에 지쳐하는 모습을 보며 속상하기도 하고, 평생 소원이었다는 비엔나에서 음악회를 보지 못해 속상해하는 모습이 가장 미안했다. 다음에 온다면 엄마가 비엔나 음악회를 볼 수 있게 해 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도 가장 좋았던 순간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다뉴브강 유람선에서 엄마랑 저녁 식사를 먹었던 시간이었다. 식사를 하고 나가니 해가 지고 헝가리 국회의사당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내가 꼭 찍고 싶다고 했던 야경, 엄마는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많이 찍어주셨다. 그렇게 우리의 추억에 남아있는 동유럽.

엄마가 행복해했던 크로아티아 해변
엄마랑 같이 먹은 마지막날 프라하의 젤라또

생각해보면 내가 스트레스 받을 일이었나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이다.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 생가보다 좋아하는 브랜드의 세일을 보고 나를 불렀던 엄마를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난다. 우리 모녀만 자유여행이 끝나면 두 손이 가득하게 나타나곤 했지. 크로아티아 호텔 앞바다를 보며 즐겼던 산책, 헝가리 어부의 요새를 들어가고 싶다고 그 한 바퀴를 열심히 뛰었던 우리 (들어갈 입구가 없습니다..), 플리트비체의 아름다운 풍경을 같이 걸었던 일, 프라하 광장에서 마셨던 필스너와 코젤 생맥주, 그것 말고도 우리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동유럽에서의 초여름.

엄마의 버킷리스트를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 7월이 되니 다시 떠오르는 여행의 기억이 꽤나 좋았다. 엄마도 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같이 갔던 사진을 보내오시곤 한다. 나에게 또 기회가 온자면 그때는 엄마랑 오스트리아에 다시 가고 싶다. 그때는 꼭 같이 비엔나 음악회를 보러 가자,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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