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2001)
김치 너무 맛있다. 누가 담근 거야?
맛있는 김치를 맛본 후 냉장고에 넣기 바쁜 은수(이영애)가 식탁에서 후루룩 쩝쩝 라면을 먹고 있는 상우(유지태)에게 김치 담근 이를 물어봅니다. 엄마가 안 계신 상우는 아버지가 담가준 김치라고 대답한 후 혹시나 싶어 은수에게 '김치 담글 줄 아냐'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너무나도 당당하게 김치 정돈 담글 줄 안다며 자신 있게 대답하는 은수. 그런데, 상우가 뜬금없이 어릴 때 아버지한테 죽도록 맞았다는 이야기를 꺼내더니 갑자기 ‘사귀는 사람 있으면 집에 데려오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앞뒤 맥락이 전혀 맞지 않는 상우의 이야기에 당황한 은수. 하지만 상우의 말이 무슨 말인지 찰떡 같이 알아들은 은수는 정말 절묘한 거절의 이유를 댑니다. 사실은 김치를 못 담근다고 말이죠. 남자 친구의 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갈 만큼 둘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지도 않고, 그럴 만큼 남자 친구를 깊이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나 김치 못 담가.”라는 말만큼 기가 막힌 핑곗거리가 있을까요? 사랑과 관계의 문제를 음식과 기술의 문제로 치환시켜 얘기하는 은수의 화법엔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잘 돌려서 얘길 해줘도, 은수의 진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우는 자기가 김치를 담궈주겠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상우가 직접 김치를 담가준다 한들, 은수가 그 김치를 먹을 일도 없거니와, 상우의 아버지를 뵈러 그의 집에 갈 일도 결코 없을 거란 사실을, 상우는 과연 언제쯤에나 알게 될까요?
영화 <봄날은 간다>(감독 허진호)는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인 한은수와 사운드 엔지니어 이상우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입니다. 허진호 감독의 감성적인 연출과 이영애와 유지태의 인상적인 연기 덕분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불후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죠.
영화 속에서 상우와 은수는 '김치사건' 이후에도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진짜 이별은 이듬해 봄, 벚꽃이 활짝 핀 어느 봄날에서야 찾아옵니다. 우연찮게 상우의 소식을 듣게 된 은수가 찾아와 '우리 같이 있을까?'라며 또다시 상우의 마음을 흔드는 말을 던지죠.
은수는 상우와 다시 연애를 시작하고 싶어 하지만 상우는 이제 다시는 은수와 연애하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은수와 다시 시작한들 그 사랑은 결국 또 봄날의 벚꽃 시즌처럼 짧게 끝나고 말 것이란 걸 상우는 이미 몇 번의 뼈저린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죠.
활짝 핀 벚꽃은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해 주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 뿐입니다. 하지만 벚꽃이 지고 난 후 올라온 푸른 나뭇잎들은 봄여름 가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우리에게 푸른 행복을 안겨줍니다. 남녀의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간편하게 빨리 먹을 순 있지만 순간의 허기만을 채우고 마는 라면 같은 사랑보다는, 정성껏 담가서 오랜 시간 동안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맛있는 김치 같은 사랑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더욱 배부르게 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