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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 Sep 25. 2015

라면은 짧고 김치는 길다

봄날은 간다 (2001) 

김치 너무 맛있다. 누가 담근 거야?


맛있는 김치를 맛본 후 냉장고에 넣기 바쁜 은수(이영애)가 식탁에서 후루룩 쩝쩝 라면을 먹고 있는 상우(유지태)에게 김치 담근 이를 물어봅니다.  엄마가 안 계신 상우는 아버지가 담가준 김치라고 대답한 후 혹시나 싶어 은수에게 물어봅니다. 


상우) 김치 담글 줄 알아?

은수) 그러엄. 못 담글 거 같아?


너무나도 당당하게 김치 정돈 담글 줄 안다며 자신 있게 대답하는 은수. 그런데, 상우가 뜬금없이 어릴 때 아버지한테 죽도록 맞았다는 이야기를 꺼내더니 갑자기 ‘사귀는 사람 있으면 집에 데려오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 스틸컷


앞뒤 맥락이 전혀 맞지 않는 상우의 이야기에 당황한 은수. 하지만 상우의 말이 무슨 말인지 찰떡 같이 알아들은 은수는 정말 절묘한 거절의 이유를 댑니다. 


은수) 나, 나 김치 못 담가.


남자 친구의 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갈 만큼 둘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지도 않고, 그럴 만큼 남자 친구를 깊이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나 김치 못 담가.”라는 말만큼 기가 막힌 핑곗거리가 있을까요?

사랑과 관계의 문제를 음식과 기술의 문제로 치환시켜 얘기하는 은수의 화법엔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잘 돌려서 얘길 해줘도, 은수의 진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우입니다.


상우) 내가 담가줄게. 내가 담가줄게.



아무리 상우가 직접 김치를 담가준다 한들, 은수가 그 김치를 먹을 일도 없거니와, 상우의 아버지를 뵈러 그의 집에 갈 일도 결코 없을 거란 사실을, 상우는 과연 언제쯤에나 알게 될까요?




영화 <봄날은 간다>(감독 허진호)는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인 한은수와 사운드 엔지니어 이상우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입니다. 허진호 감독의 감성적인 연출과 이영애와 유지태의 인상적인 연기 덕분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불후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죠.

영화 속에서 상우와 은수는 '김치사건' 이후에도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진짜 이별은 이듬해 봄, 벚꽃이 활짝 핀 어느 봄날에서야 찾아옵니다. 우연찮게 상우의 소식을 듣게 된 은수가 찾아와 '우리 같이 있을까?'라며 또다시 상우의 마음을 흔드는 말을 던지죠.


은수는 상우와 다시 연애를 시작하고 싶어 하지만 상우는 이제 다시는 은수와 연애하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은수와 다시 시작한들 그 사랑은 결국 또 봄날의 벚꽃 시즌처럼 짧게 끝나고 말 것이란 걸 상우는 이미 몇 번의 뼈저린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죠.


활짝 핀 벚꽃은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해 주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 뿐입니다. 하지만 벚꽃이 지고 난 후 올라온 푸른 나뭇잎들은 봄여름 가을까지 오랜 기간 동안 우리에게 푸른 행복을 안겨줍니다. 남녀의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간편하게 빨리 먹을 순 있지만 순간의 허기만을 채우고 마는 라면 같은 사랑보다는, 정성껏 담가서 오랜 시간 동안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맛있는 김치 같은 사랑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더욱 배부르게 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김치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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