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 그림 한 점
“그 소문이 사실이에요?” 식사를 마치고 이동하는 도중 남자 변리사 동기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앞뒤 없는 질문에 “어떤 소문이요?”라고 되받아 물었다. “L과 이미 커플이 되었다고 하던데.” 알고 있는 소문이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아닌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렇죠? 헛소문일 줄 알았다니까. 알겠어요.” 거침없이 묻고 용무를 마치고 시원하게 돌아서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남자, 익숙하지 않은 태도였지만 싫지 않았다. 피식 웃음도 나왔다.
2001년 12월 변리사 시험에 합격했다. 합격자 200명은 2002년 2월 100명씩 나누어 대전과 서울에서 2주씩 실무 연수를 받았다. 결혼 적령기 대다수 미혼의 남녀가 함께 모여있으니 하나둘 커플도 생겼고,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소문도 무성했다. 나도 열심히 놀았고, 가깝게 지내는 무리도 생겼다. 우연히 동선이 겹치는 남자 동기들과 커플이 되었다는 소문의 주인공도 되었지만, 소문일 뿐이었다.
대전에서의 연수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꽤 많은 인원이 함께 맥주를 마시는 자리였다. 나에게 소문이 사실이냐고 확인했던 그도 함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모두 조금씩 취기가 올라갈 때 그는 내 옆에 와 있었다. “저와 결혼하시죠.” 그가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동기들도 들었고, 박장대소했다. 늘 빨리 결혼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달콤한 결혼 생활을 꿈꿔서라기보다 본가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연수를 시작하고 자기소개를 할 때면 미혼이지만 빨리 결혼하고 싶다고 얘기하고 다녔다. 그래서 대뜸 결혼하자는 그의 얘기는 전혀 뜬금없는 말은 아니었다. 불씨는 내가 지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날 언제 봤다고, 내가 어떤 사람일 줄 알고, 무작정 결혼하자는 걸까. 그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맞받아쳤다. “그러죠.”
연수를 마친 변리사들은 각자의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프리챌에 서로의 소식을 알리는 동기 게시판이 있었다. 취업이 늦은 편이었던 나도 드디어 동기 게시판에 취업 소식을 알릴 수 있었다. 바로 그에게 메신저가 왔다. 취업 축하하는 밥을 사겠다고 했다. 직장이 생겨 신나 있었고, 싫지 않았던 그가 궁금하기도 해서 승낙했다. 2002년 3월 18일 나의 취업을 축하하는 식사는 우리의 첫 데이트가 되었다. 단둘이 처음 만난 날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는 그날 서로 많이 웃겼고, 웃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6일 결혼했다. 결혼기념일이 된 6월 16일은 그의 생일이다. 결혼식 날짜를 정하면서도 그는 나를 웃겼다. 매해 생일마다 나를 선물로 받으며 살겠다고. 결혼 24년 차인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는지는 모르겠다.
그림 속 선남선녀는 얇은 벽에 기대고 있다.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한다. 오물거리는 입에는 하고 싶지만 애써 참고 있는 이야기가 가득 담긴 것 같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는 두껍지도, 단단해 보이지도 않는 벽을 살포시 걷어내면 어떨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남녀는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기대어 참았던 말을 뱉어내지 않을까. 사람을 처음 만나면 낯설고 불편하다. 사이를 가로지르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통성명과 호구 조사를 하고, 같이 일하고, 함께 좋아하는 활동을 하며 그 벽은 조금씩 허물어진다. 결정적 한 방으로 와르르 무너져 내릴 때도 있는데 나에게 그 한 방은 웃음이었을 때가 많았다.
앞뒤 없이 그 소문 사실이냐고 물었을 때도, 느닷없이 자기와 결혼하자고 했을 때도 그가 흥미로웠다. 지금도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특유한 말투가 재미있고 좋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낯선 남자의 청혼에 “그러죠”라고 대답했던 나도 흥미진진했단다.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재미있는 내가 좋았다고 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으면 앙다물었던 얼굴 근육에 힘이 풀리면서 해결 방법이 떠오른다. 만난 지 3개월도 안 된 사람과 결혼할 수 있었던 용기도 서로의 웃음에서 솟아났다.
가끔 어디가 좋아서 결혼했냐고 누군가 물으면 우리 부부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익살스러운 서로가 좋았다고. 웃겨서 좋았던 우리는 지금도 서로를 웃기며 살고 있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내쉬는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미소 버튼으로 걷어 올렸다. 물컹한 진흙 바닥에서 망설이고 있으면 웃음꽃으로 보송하게 덮어 말리는 요술을 부렸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오래오래 서로의 미소가 되고 싶다. 까르르 박장대소하게 하며 함께 살아가고 싶다.
청년기 나에게 보내는 질문 :
상대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대상은 남녀노소 누구라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