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오를 준비

중년기 그림 한 점

by 박윤경

“그림 그리세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윗집 아저씨가 물었다. “예?”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왔고, 어떻게 알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닌데요. 카톡 프로필에 보니 그림 그리시는 것 같더라고요.” 아하, 얼마 전 화장실 누수 공사로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자동으로 SNS 친구로 등록되었고, 나도 윗집 아저씨 프로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야 상황이 이해됐다. “네, 얼마 전부터 조금씩 그리고 있어요.” “취미가 있는 건 좋죠. 저는 노래 부릅니다. 하하하” “노래요?” 나도 물었다. “합창단에서 테너 하고 있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마주쳤다. “저 이번에 대학 합격했어요, 수능 봐서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수능이요?” 감탄이 참아지지 않았다. “네, 수능 봐서 음대 입학했습니다, 오랜만에 공부하려니 힘들더라고요. 제가 87학번이거든요. 그때는 공부하기 참 싫었는데, 좋아하는 공부를 하니 재밌어요. 일하고 공부하고 힘들긴 한데, 재미있네요.”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분의 표정이 행복해 죽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미대와 대학원을 알아봤다. 수능과 포트폴리오 준비도 자신 없었고, 수험생 아이들도 마음에 걸려 포기했다. 웃음꽃이 만개한 표정을 보면서 존경심과 부러움이 일었다.


딱 5년 회춘시켜 준다는 동네 사진관에 프로필 사진을 찍으러 갔다. 용도를 묻기에 번아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이야기를 쓴 첫 책에 넣을 사진이라고 했다. 사진관 사장님은 공들여 사진을 찍었다. 그는 IT관련 사업을 10년 넘게 했고, 문득 허무감이 들어 사업을 접었다고 했다. 홍대 입구에 사진 스튜디오를 시작했지만, 코로나로 어려워져 또 접었고, 지금 이곳은 산책 중 창문에 붙은 “임대” 글자에 끌려 계약부터 했다고 한다. 한적한 거주 지역에 사진관을 열고 이웃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으며 여유롭게 사는 지금이 가장 나답고 행복하다고 했다. 사장님의 이야기는 꼭 내 이야기 같았다. 오늘의 주인공은 나인데 본인 얘기를 너무 오래 했다는 멋쩍은 말씀에 “책은 사장님이 쓰셔야겠어요.” 진심의 응원을 보내드렸다.


나 찾기에 나선 중년 친구들이 많다. 퇴사 후 그림을 배우고, 새로운 전공을 찾아 진학하고, 미뤘던 해외 봉사를 실천하고, 취미를 본격적인 직업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번아웃을 기회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건 내가 비주류 변리사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때가 되면 수입이 보장되는 일에 전념한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 시간과 품을 들인다. 결혼과 육아의 짐은 너무 무거워서 딴청을 부릴 수 없게 한다. 그렇게 이삼십 년 살아내면 다리의 알통이 줄고 꼿꼿한 허리는 힘을 잃고, 머리카락에 흰서리가 내린다.


어느 날 문득 중력의 방향을 따라 흘러내리는 얼굴의 주름을 보며 느닷없이 나이를 실감한다. 그때서야 깨닫는다.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일을 찾고 싶다. 동심을 찾아 흠뻑 빠져 몰입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싶어진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 살며 남보다 잘하는 숙련공이 되는데만 집중했다. 그러느라 나머지 욕구와 재능은 깊숙이 묻어뒀다. 잔가지를 쳐내며 굵직한 몸통으로 성숙한 중년이 되면 참아왔던 욕구가 슬슬 눈을 뜨고 자아실현을 꿈꾼다. 이상과 현실의 균형, 수용과 양보를 통해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중년이다.


image010.jpg 박윤경 / 나들


<나들> 속 다섯 개의 머리는 색도 다르고 바라보는 방향도 다르지만, 몸통은 하나다. 지그시 눈 감고 있지만 날기를 포기한 건 아니다. 고요히 숨죽이고서 날아오를 기회를 엿보고 있다. 다섯 개의 머리 중 우월하게 치고 나가는 하나가 있을 수도, 모두 비슷하게 성장할 수도 있다. 그동안 목표와 결과 지향적으로 살았으니, 이제는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양보하는 과정도 즐기는 건 어떨까. 어릴 때 서로의 재능에 감탄하고 응원했던 것처럼 진심으로 함께 즐기며 인생 후반을 살고 싶다. 그리고 싶은 사람 그림 그리고, 노래하고 싶은 사람 노래 부르고, 꼭 화가가 되거나 음악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일이 있고 그것을 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날마다 그리고 쓴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다. 과정을 즐기면 그뿐, 다양한 <나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중년기 나에게 보내는 질문 :

생각이 많아 결정하지 못했던 일 이야기를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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