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후 어느 날의 그림 한 점
사랑하는 윤경에게
<눈치 보지 마> 이 작품 기억나니? 너의 첫 개인전 작품이었지. 첫 개인전을 하게 되었을 때 너는 매일 다짐했었어. 이제 나로 살겠다고. 더 이상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고.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주인공의 자리를 양보하고, 아무도 하지 않겠다는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그 다짐이 힘을 잃고 예전으로 돌아갈까 봐, 손가락에 목탄을 묻혀 문지르고 쓰다듬어 백조를 완성하는 내내 맹세했었지. 전시를 마치고 거실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그림을 걸어두고 볼 때마다 다짐했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잘했어.
2043년 4월 볼로냐의 경치는 어때? 매년 봄 익숙한 일정으로 오는 볼로냐 국제도서전이어도, 올 때마다 새롭고 가슴 뛰지? 전 세계의 다양한 그림책, 그림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세계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너의 모습이 아름답다. 오늘은 B 출판사에서 출간한 “하얀 블라우스”와 S 출판사에 출간한 “어린이 크리에이터 시리즈”의 대만과 중국 수출계약까지 해내고, 대단해! 예상치 못했던 이벤트 덕분에 연장된 볼로냐에서의 일정을 여한 없이 즐기길! 부랴부랴 돌아가는 항공편을 변경하고, 숙박을 연장하고, 한국 일정까지 연기해야 했지만, 이보다 행복한 노고가 있을까? 이번이 첫 수출은 아니지만 그림책이 수출되는 경험은 늘 처음처럼 설렌다던 너의 얘기가 생각나.
20년 전 느닷없이 그림을 시작하는 네가 신기했어. 과연 언제까지 그릴까 궁금했는데, 개인전을 하고 산문집까지 출간하는 걸 보면서 예술에 대한 너의 의지를 알 수 있었다. 본격적인 작업을 위해 작업실을 마련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이해되었어. 아이들의 뒷바라지 앞에서 작업실 꿈을 미루고, 최선을 다해 엄마 노릇을 하는 모습도 감동이었고. 세상일에는 때가 있는데, 놓치면 평생 후회할 부담이면서 기회라는 걸 늦지 않게 알아차려서 다행이었지. 작업실은 포기했지만 그리기는 포기하지 않았어. 큰 그림 대신 작은 그림을 매일 그렸고, 공간과 시간이 필요한 재료 대신 빨리 쉽게 쓸 수 있는 재료를 찾았지. 꾸준히 글 쓰는 모습도 보기 좋았어. 핑계를 치우고 방법을 찾아 모래알 같은 하루를 차곡차곡 쌓는 모습을 보면서 예술가로 인정했다.
네가 그림책을 시작할 즈음 기다렸다는 듯 그림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신기해. 그림책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2025년은 ‘그림책의 해’로 선정되었잖아? 미술시장에 대한 젊은 세대의 관심이 커지면서 쉽고 친절하고 재미있는 일러스트의 인기가 높아졌고, 그림책 그림에 대한 관심도 커졌어. 당시 AI가 그린 그림과 디지털 그림을 향한 호기심은 되레 손에 잡히는 아날로그 그림을 다시 보게 했었지. 그림책 원화를 소장하려는 사람도 늘어났고, 덕분에 그림책 작가들의 입지가 좋아졌고, 수입원도 다양해졌지. 너도 그림책을 출간하고, 그림책 원화, 이와 비슷한 그림을 그려 전시, 판매하고, 그림을 매개로 넓은 세상,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고 있잖아.
너는 번아웃을 기회로 작가가 되었어. 중년이 되어 현업과 육아에서 은퇴하고 예술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살아온 이야기를 쓰고, 그리고, 노래하지. 늦깎이 예술가들은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늦은 나이에 시작해서 순발력, 정교함은 떨어질 수 있어. 그렇지만 삶의 모든 여정이 그리고 쓰고 노래 부르는 대상이 되니 소재가 마를 일은 없어. 늦게 시작했어도 매일 그리고 쓰고 노래 부르면 예술가야. 세상에 똑같은 인생은 없어. 그러니 똑같은 예술도 없지. 우리의 이야기는 모두 신선하고 소중해. 희로애락 가득하고 다사다난했던 삶은 소재와 대상을 모았던 예술가가 되는 과정이었어. 어때, 너의 모든 순간이 소중하지? 친절하고 다정했던 윤경 씨는 친절하고 다정한 예술로 세상을 따뜻하게 할 거라고 믿어.
변함없이 응원하고 사랑했고,
변함없이 응원하고 사랑할게.
20년 후 나에게 보내는 질문 :
다른 사람의 눈치 보느라 하지 못한 일 이야기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