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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영화를 보는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있는 일은 책을 읽는 행위와 같습니다. 나는 풍경 속에서 두툼하고 머리가 뚜껑만 있는 안경을 쓴 남자를 볼 때마다 이유없이 싫어했던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이유가 없다는 것은 비로소 존재하는 걸까요 사라진 걸까요.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고 오늘은 영화를 보려다가 상영관에 들어서고 나서야 날짜를 잘못 예매한 걸 알았습니다. 스크린에는 이미 수도 없이 본 영화의 한 장면이 흘러가고 있었고 나는 그걸 보면서 자리에 앉지 못하고 계단에 가만히 서서 비슷하다, 비슷하네 상영 시간이 되려면 멀었는데 이곳은 빠르네 하며 감상했습니다.


죽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습니다. 오로지 말하기 위해서. 나는 정상인이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고 싸이코패스는 아니지만 여느 사람처럼 어느정도 미쳐있다고 말하기 위해서요. 휴지 없이 그 의자에서 웃음 없는 대화 속 내가 지을 표정을 떠올립니다. 아주 조금은 불행하고 아주 조금은 미끄럽습니다. 집을 사이에 두고 두 정거장이 있습니다. 늘 어디에 내려야 할지 나는 고민합니다. 영영 아무 곳에도 내리지 못할 것만 같지만 그런 상상을 할즈음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올라갑니다.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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