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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alintheSea Apr 09. 2024

퇴사여행 14. 두 번째 오로라를 기다린 이야기

Iceland Day 8. 분홍빛 노을이 물들이는 설산의 절경

아침은 어제 남은 닭죽을 먹고, 우리는 온천욕을 한번 더 하기로 하고 근처 보르가르네스라는 마을의 수영장엘 방문했다. 공공 수영장들의 부활절 영업시간이 인터넷에 나와 있었는데, 다행히 그날 수영장이 열려 영업시간이 되자마자 우리는 뜨거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설은 전에 갔던 아쿠레이리 보다는 좀 낡고 작은 것 같긴 했지만 유황 냄새가 나는 수질이나 평화로운 순간은 그에 못지않게 아름답고 즐거웠다. 공립 수영장들은 가격도 만원을 조금 넘는 정도로 여기 물가를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게 저렴했는데, 대부분 실외 온천욕을 즐길 수 있어서 너무 만족스러웠다.

온천욕을 즐긴 후 다시 한번 데친 소시지로 만든 핫도그와 아침에 캠프장에서 만들어 온 계란과 감자로 만든 부침개를 먹고 난 후 우리는 처음으로 마을에 있는 작은 카페엘 들렀다. 사실 카페 물가 또한 대부분 한국의 1.5~2배쯤은 생각해야 될 정도로 살벌하긴 했는데 그래도 미리 찾아본 평점도 훌륭해서 작은 마을의 카페는 어떨까 호기심이 생기긴 했다. 어제까지 너무 달리기도 했고.

카페는 뭐랄까, 끝나지 않은 크리스마스 같은 장식들로 가득했다. 사실 그곳은 음료만 파는 게 아니라 여러 간단한 끼니를 때울 음식들도, 각종 선물용품과 액세서리들도 파는 곳이었는데 2층에는 숙소까지 겸하고 있어 정말 말 그대로 종합적인 곳이었다. 카페의 천정까지 각종 그림과 장식들로 빼곡했는데, 신기하게도 난잡한 느낌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를 좋아하는 누군가의 응접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인의 취향이 많이 반영된 것 같아서 차 마시는 내내 꽤 편안히 늘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보르가르네스에서 나온 우리는 싱벨리어 국립공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서쪽으로 이미 넘어온 우리에겐 두 가지 옵션이 있었는데, 서북쪽으로 올라가며 피요르드 경치를 계속 구경할 수도 있었고, 사실상 링 로드를 한 바퀴 다 돌았기 때문에 급하게 지나친 감이 있었던 소위 골든 서클이라 불리는 수도 근처의 관광 명소들을 조금 더 찾아볼 수도 있었다. 우리는 탁 트인 국립공원에서는 왠지 오로라를 더 잘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국립공원으로 향했고, 자기가 근무한 와중에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처음이라는 친절한 레인저가 입장료를 계산하고 간단한 캠핑장 설명을 해 주었다. 빨래가 밀려 이곳에서 코인 세탁기와 건조기를 쓰기로 했는데, 각각 30분씩 움직이는데도 1.5만 원가량을 내야 한다는 사실에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까웠다. 그래도 이번 여행 중 딱 한 번이니까...

저녁은 오랜만에 계란을 가득 넣은 라면과 양상추 샐러드를 먹었다. D는 한국식 라면 대비 너무 맛이 없다며 투덜대었지만, D가 챙겨 온 라면 스프와 코인 육수 등이 들어가 맛은 이미 너무 훌륭했고 좋았다.

바람은 조금 잠잠해진 것 같았지만, 드넓은 황야 가운데가 캠프사이트라 매섭게 불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천천히 분홍색 노을이 주변의 설산을 물들이며 저물어가는 모습은 숨이 막힐 듯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하나둘씩 떠오르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란!!!

아이슬란드에 와 있는 동안 계속해서 마치 다른 별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질적인 생태계와, 정말 갓 만들어진 것 같은 산에 식생이 없는 환경들과 마주하게 되어서인 것 같다. 아름답지만, 걸어 다닐 수 없어서 좀 겨울 여행은 힘든 점이 많은 것 같다. 특히 눈바람이 시작된 이후 밖에서 5분 이상 걸은 적이 없을 만큼 외부 날씨는 혹독하다. 내일은 어떨지?

장밋빛의 석양이 반대쪽 산의 눈에 비쳐 산이 옅은 주홍빛으로 물들어 천천히 아래에서부터 어두워진다. 매서운 바람도 저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에는 침묵하는 것 같았다. 노을은 천천히 산꼭대기 위로 사라지고, 주위를 둘러보면 거대한 하늘과 산, 그리고 땅 뿐이다.  무엇을 얻으려고 이 멀리까지 왔나. 아마도 용기...


어떤 용기는 노래 한 곡으로도 얻을 수 있지만 온 대륙을 다 휘젓고 다닌대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용기와 무모함을 내면에서 구분 지어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건 언제나 마음에 달린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남의 시선이나 평가, 이 나이에 무엇을 하겠어하는 비아냥 또는 가족의 우려. 여전히 돌아가면 그대로 겪어야 하지만, 나는 그만큼의 용기를 얻었을까? 아니면 그저 회피하듯 한 번은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으로 달려와 버린 걸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충실히 여행하며 많은 것들을 눈과 마음에 담을 뿐.

거대한 국립공원 캠핑장 한가운데서 우리는 이틀째 오로라를 기다렸다. 태양풍이 만들어내는 오로라 자기장은 북극 쪽을 계속 흘러가는데, 내가 있는 위치에 그 자기장이 보여야만 오로라를 볼 수 있었다. 과연 오늘 밤에도 그 행운이 따를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잠잠하고 별들은 쏟아지고 있고... 체감온도는 영하 11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마른기침이 심해져서 항히스타민제와 진통제를 또 하나 먹고,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들을 또 지나간다. 아니면 어쩌겠어? 눈구름은 뚫고 지나가는 게 맞고, 아픈 기간도 어떻게든 잘 관리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버텨 봐야지.

여명의 눈동자 음악,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 등을 들으며 기다린 오로라는, 12시가 지났어도 어제처럼 화려한 화폭을 보여 주지는 않았다. 오로라 보는 게 그렇게 운이 좋게 볼 수도 있지만 태양풍이 약하거나 내가 있는 곳까지 안 흘러오거나 하면 또 이렇게 잘 보기 어려운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자기 전 마지막 순간에 거대한 무지개처럼 밤하늘을 가로지른 호선이 있었는데, 도저히 한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었다. 대신 큰 국립공원 캠핑장답게 별은 정말 쏟아지도록 많았는데 오로라를 제대로 못 본 아쉬움은 있어도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은 그대로 멋있는 순간이었다. 이 경탄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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