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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alintheSea Apr 09. 2024

퇴사여행 13. 눈보라 끝에 오로라를 마주하다

Iceland Day 7. 낡은 헛간의 고양이와 오로라


전 날은 운전석과 조수석을 사다리로 이어 만든 곳에서 잠을 잤다. 전날 일을 나누어 하다 그런 건 네가 좀 하지? 라는 말을 들었는데 마음이 약간 서운했기도 하고, 끊이지 않는 기침으로 빨리 미리 쉬고 싶기도 해서 독립적인 공간에 들어가서 바로 잠들었었다.

사실 이런 좁은 공간에서 한정된 자원을 쓰면서 싸움이 없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요리를 사실상 D가 전담하게 되면서 운전도 많이 담당해주고 있는 D가 겪는 피로도와 긴장감은 너무 클 것이었고, 또 그런 와중에 일들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서로 섭섭함이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나도 운전을 더 많이 해야지 생각하긴 하지만, 긴장한 채 눈길을 운전하는 것은 매우 빨리 탈진하는 반면, 눈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쉴 시간이 거의 없긴 해서 나도 아이슬란드의 북쪽을 건너오는 과정은 너무 피곤하고 추운 여정이었다.

요리로 말할 것 같으면, 원래 Y는 요리를 안 하는 편이고, 나는 요리를 하긴 하지만 이런 과격한 상황에서는 우유에 오트밀을 며칠씩 부어 먹기만 해도 상관없는 편이었다면 D는 중간중간 밥도 꼭 먹어야 하고 다양한 요리를 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요리는 자연스레 D가 전담하고, 남은 주방 보조나 설거지를 다른 두 명이 하게 되었다. 그래도 섭섭했던 그날 바로 말을 내뱉지 않고, 내 마음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정말 섭섭했던 맥락을 천천히 다음 날 둘이서만 있을 때 조용히 설명했는데, D는 원래 하려던 말의 의도가 그런 게 아니었다며 사과했고, 나도 바로 마음이 잘 풀려서 좋게 마무리되었다. 사실 감정은 이미 발생한 순간 사라지는데, 사람이라 역시 한번 발화된 말과 감정에 계속 휩쓸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떻게든 지혜롭게 잘 지나가야지...

간밤에 잠들었던 1번 국도에서 바로 이어진 주차장은, 주변에 창고도 많아 밤중엔 굉장히 밝았고 구름과 바람도 엄청나 오로라는 보지 못했다. 우리는 새벽이 되자마자 다시 길을 나섰는데, 화장실이 있는 주유소나 수영장을 찾아 조금이라도 씻고 개인 정비를 하려고 바로 출발했다. 그러나 부활절 일요일 이른 아침엔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라 우리는 다음 주유소로, 또 다음 주유소로 이동했다. 어딘가에는 화장실을 쓸 곳이 있기를 바라며 한 시간 정도 달렸을까... 어느 작은 다리 앞에 또 차들이 멈추어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사고가 난 줄 알고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길 가운데 눈이 너무 많은 구간이 있어 차들이 지나가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상황이라 우리 일행도 함께 나가 눈을 치우며 지나가는 것을 돕고, 겨우겨우 밀리고 뒤에서 밀어주고 하면서 우리 차도 눈 언덕을 넘어서는 데 성공했다! 3분 뒤쯤 제설차가 우리를 지나쳐 사고 현장으로 가는 것을 보았으니, 아마 꾸준히 기다렸다면 별 탈 없이 지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어떻게 알겠어? 지금 가야 할지 기다려야 할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

힘든 구간을 지나치고 나서 살짝 꺾어 들어간 곳에 있던 주유소는 아주 다행히도 화장실이 열려 있었다! 주유소에서 파스타를 해 먹고 나서 우리는 수영을 하려던 계획을 내일로 변경하고, 그 근처에 있는 캠프사이트로 가서 쉬다가 밤에 오로라를 보기로 결정하고, 작은 마을에 있는 캠프사이트로 도착해서 결제하자마자 모두 기절했다. 나는 천식 기침이 계속 발작하듯 있어서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헛간의 작은 소파에서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옆에 앉아 있던 검은 고양이가 함께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녁은 닭죽을 먹었다. 나는 대체 생닭을 사서 어쩌려고 하나 싶긴 했지만 오래 끓인 닭죽은 확실히 원기 회복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긴 했다. D는 어릴 때 아버지와 형제들이 자주 해 먹은 음식이라 평소에도 좋아한다며, 통마늘을 잔뜩 넣은 닭죽을 이 열악한 곳에서도 놀랍게도  해 내었다. 좀 따뜻한 곳에서 몇 시간 자니 다행히 기침도 좀 가라앉은 것 같았다. 우리는 오로라가 오기를 기다리며 옆 테이블에서 보드 게임을 하던 이탈리아인으로 추정되는 분들께 루미큐브를 빌려 몇 라운드를 돌리며 놀기도 했다.

10시 정도였을까... 잘 준비를 하러 렌터카에 세팅을 하러 D와 Y가 간 사이 공용 주방을 떠나던 외국인 커플이 다시 문을 열더니 나에게 오로라가 떴다고 알려 주었다. 하늘 위에 흐릿한 선이 하나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걸 야간 카메라로 찍어 보니 녹색의 오로라가 아닌가! 우리는 부랴부랴 조금 더 잘 보이는 길가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댔다. 그리고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불빛 없는 주차장으로 차를 몰아가서 오로라를 조금 더 감상했다.

오로라는... 뭔가 말로 표현하기 참 어렵다. 실제로는 카메라에 담긴 것처럼 녹색으로 번쩍거리진 않았는데, 그래도 구름과는 오묘하게 다른 커튼 같은 것이 밤하늘을 가로지른달까. 카메라의 야간 모드로 빛을 축적하면 비로소 우리가 사진에서 보던 녹색 빛깔의 커튼 같은 오로라가 선명해지는데, 그날은 오로라 끝이 일렁이며 춤추듯 흔들리기도 했다. 그날도 너무 추워서 오로라를 조금 보고는 다시 차 안으로 뛰어들어가기를 반복했지만, 4월이 다 되어가는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는 매우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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