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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Feb 21. 2024

귀녀의 꿈

토지 1부 2권, 통권 2권


또출네는 무너진 누각과 더불어 타 죽었다. 최 씨 가문의 마지막 사내였던 최치수는 삼끈으로 교살되어 세상에 마지막을 고했다. 370p.


아무래도 2권은 귀녀 열망의 흥망성쇠이고, 어긋난 욕망의 기승전결이다. 욕망이 방향성을 잃으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는 시대를 떠나 도드라지게 떠오른다. 반상의 법도가 있고 주인댁에 몸이 매인 종이 감히 신세한탄을 넘어 전복을 꿈꾸는 순간이 올 수 있는가? 귀녀는 어디서 그 꿈을 가지게 되었을까. 


비뚤어진 능동성을 가운데 놓고 문제를 바라보자면 귀녀는 정말이지 현대적 인물이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문제 해결 방안을 탐구하고, 실행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확정하고 심지어 진행시킨다. 양반집 아씨로 태어난들 별 수 없는 반상의 법도를 살아야 하는 시절에 여자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은 양반으로 태어나 부모가 짝지어준 상대와 평생을 해로할 수 있도록 아들을 낳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적인 선택이나 판단은 불가능하다.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면 가능은 하겠으나 천한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안전과 자유는 여자가 동시에 누릴 수 있는 명제가 아닌 시대였다. 귀녀가 가진 열망은 그래서 더 도드라지게 전복적이다. 


김평산도 칠성이 놈도 치욕스러웠으나 귀녀는 견뎌낸다. 최치수의 아이를 배고 신분의 자유를 얻고 재물을 얻으면 그만일 뿐, 몸은 도구요, 과정이고, 결과이다. 내가 아들만 하나 낳는다면, 천출인들 최 씨 집안 당대의 유일한 아들이다. 서자라도 제주이고, 성씨를 지켜낼 다음 세대의 시작점이다. 귀녀는 다만 완벽한 계획에 생각지도 못한 변수를 만났을 뿐이다. 최치수의 몸은 어머니의 비밀을 몸에 새기듯 비밀에 복수하듯 고통스레 스스로를 저주하고 망가졌을 뿐이다. 


‘그렇다고 어둠이 오기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358p. 


욕망의 끝을 봉쇄당하고 귀녀는 복수를 결심한다. 감히 나를 강포수 따위에게 주겠다고?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견뎠는데 감히 강포수 따위를 하고 부들부들 떤다. 전복을 꿈꾼 자의 내일에 이미 다음 선택지가 사라졌다. 계획이 망가졌다면 전체를 부숴버리는 방법만이 남을 뿐이다. 최치수는 더 이상 상전도 아니고, 태어날 아이의 죽은 아버지여야만 한다. 귀녀의 열망에 죽음마저도 도구이다. 현대적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토지를 처음 읽던 열몇 살에는 귀녀가 혐오스러웠다. 귀녀의 비뚤어진 능동성이 거슬릴 뿐이었다. 지금 반복해서 읽을수록 신분제가 법이던 시대, 가장 하층의 여자가 꿈꿀 수 있는 내일이 무엇이었을까. 귀녀에게 내일이 있었을까. 종의 자식으로 태어나 종으로 자라 종으로 살다 종으로 죽는다. 예쁘장한 얼굴은 쉽게 손타고 버려질 조건일 뿐이다. 밥하고 빨래하고 소처럼 일하다 혼례도 없이 주인이 짝지어준 남자 종을 만나 자식 낳아 종으로 키워야 하는 삶. 고만 아득해지고 말았다. 귀녀의 욕망을 쉽게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사람답게 살고 싶은 열망이 귀녀의 처지에서 발현되었을 뿐이다. 


귀녀에게는 죄가 없다. 


다만 종으로 태어났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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