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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Mar 06. 2024

금녀의 봄

토지 2부 4권, 통권 8권


금녀는 가벼운 보조로 걷는다. 햇빛은 밝고 인생이 아름답다. 아비가 딸을 술집에 팔아먹은 과거의 그 비정의 추억이, 애인을 짐승 아가리에 넣으려던 잔악한 사내의 추억도 이젠 말끔히 가셔지고 없다. 금녀는 현재가 더없이 만족스럽고 고마운 것이다. 330p.


금녀, 이름만 귀한 한 많은 여자. 변두리 인물처럼 스쳐가려나 했던 금녀는 이야기 속에서 기구한 사연을 뛰어넘고 살아낸다. 저 사연들을 다 지나서 인생이 밝고 아름답고 행복하다 한다. 금녀라는 이름으로 축약된 그 시절 수많은 가난한 집 딸들을 생각해 본다. 술집에 술값대신 팔려가고, 혹은 부잣집 영감님 첩으로 팔려가고, 그 마저도 아니면 자기처럼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가 어쩔 수 없는 생을 살다 그렇게 죽어가는 그 수많은 딸들을 생각해 본다. 그 익명성들의 대표자, 전혀 귀하지도 않고 그저 이름만 귀한 금녀. 그러나 스스로 이름을 구하고 존재를 밝힌 여자, 금녀.


금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저 사연들을 어떻게 버텨냈을까. 김두수를 잡으러 온 장인걸에게 구출 같은 납치를 당하고 금녀의 생은 처음으로 자유로웠다. 김두수 같은 쓰레기한테 휘둘려 살아야 하다니 새카맣게 내려앉은 생은 그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을까. 가장 보호받아야 할 존재들로부터 배반당하고 금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갈 새로운 날들을 결심했을까.


그 시절 금녀에게 가해졌을 비난의 수위를 생각하면 등에 한기가 스민다. 여러 성추행, 폭행, 강간 사건 기사를 들여다보면 피해자를 비난하는 댓글들이 많다. 뒤에 숨어서 더러운 말들을 옮기는 쓰레기 같은 것들이 있다.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며 2차 가해를 일삼는다. 피해자는 숨도 쉬지 말고 가만히 병들어 누워 울다가 죽어야 속이 시원하단 말인가? 부산 돌려차기 폭행의 피해자 분은 가해자가 감옥에서 출소하면 죽이겠다 협박을 일삼는 가운데 자신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다고 했다. 가장 어려운 순간을 딛고 일어선 사람에게 누가 감히 족쇄처럼 피해자다움을 강요할 수 있을까? 험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왜 피해자답지 않다, 비난당해야 할까? 지금도 이렇게 여자로 살아남기가 어려운데 그때는 말해 뭐 할까. 말도 안 되는 세상의 잣대를 걷어차고 스스로의 존엄을 구축하고 버티고 일어선 위대한 인간, 금녀를 누가 감히 더럽혀진 여자라고 욕할 수 있을까.  


금녀는 언제나 다치고 무너질 수 있는 인생, 어떻게 다음으로 나아가느냐 그래서 그다음을 마주했을 때 내가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 과정을 겪어내고도 인생이 아름답다니, 겨울이 지나간 봄날 장터를 저리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니, 무엇보다 다시 사람을 향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니. 금녀의 존재는 너무도 놀랍다. 사건에 매몰되어 생을 놓아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 버텨낸다면 내일은 있다. 우리는 존재로써 살아갈 이유이고 희망이다. 금녀를 바라보며 허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는다.


저 순하고 여린 희망들이 도란도란 소리 내 빛나는 봄날의 행복이 얼마 길지 않다. 호사다마인가, 김두수가 나타났다. 불쾌하고 너무 싫다. ‘금녀 깨끗하게 죽여버려!!!’ 진짜 응원했다. 김두수는 운 좋게 살아났고 금녀의 내일은 또 얼마간 불안하다.


“금녀! 다시 용기 내 살아주세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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