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노인, 행복하셨습니까?

토지 2부 4권, 통권 8권

by 경주씨


공노인은 두메며 길상이며 월선이 봉순이 모두 기찬 얘기 속의 인물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하나의 인생이 모두 다 기차다.


‘뜻대로 안되는 것을 뜻대로 살아볼려니까 피투성이가 되는게야. 인간의 인연같이 무서운 거이 어디있나.’ 59p.


공노인을 생각해 본다. 월선의 삼촌, 간도 이주 후의 서희 일행이 자리 잡도록 큰 역할을 하는 사람, 평생 거간 일을 보고, 객줏집을 운영하는 남자. 내 눈에 공노인은 지나온 세월을 온몸에 켜켜이 쌓아놓고 증거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다. 간도 땅에서 그래도 조선 사람끼리 사고팔아야 한다는 의지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최소한의 도의를 온몸으로 지키는 사람.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공노인 식의 방법이다.


서희가 어떤 사람인가. 돌아가야 한다는 의지와 집념으로 간도에 자리를 잡고, 재산을 일군다. 공노인은 그 과정에서 이리저리 일을 봐주며 서희의 시험을 통과했는지도 모른다. 믿을만한 사람이다 판단이 서고 세월을 쌓아온 서희와 공노인. 공노인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조준구가 가로챈 최참판댁 땅을 되찾는데 평생 업으로 해온 거간 일을 예술처럼 해 낸다. 이는 돈만 생각하고 한 일이 아니다. 황량한 땅이나 먹고살만한 기반을 갖춘 공노인이 돈 말고 자신의 능력을 펼칠 장을 만나 것이다.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 먹고사는 일의 엄중함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사는 일은 재미도 필요하다. 끝을 향해 달려야 하는 인간이 시간을 견디기 위한 보상기제 랄까? 원래 세상 재밌는 일들은 대게가 돈 안 되는 호작질에서 시작한다. 호작질하며 빈둥거리다 보면 하루가 후루룩 지나는데 다 잘 밤에 누워 아이고 오늘 너무 놀았나? 싶다. 그래도 그렇게 보낸 시간이 어쩐지 완충지대처럼 내 안에 누적된다. 호작질은 팍팍한 세상살이 온몸으로 통과하며 쌓이는 피로감이 바로 심장까지 닿지 않게 둥글둥글 스르르 나를 지나가게 하는 힘이라 생각한다. 목적 없는 일들의 가치가 한 번에 피어나는 날이 생에 한 번쯤은 있다고 믿는다. 아니 사실 여러 번.


하동에 들러 파악한 평사리 사람들의 사정을 알고, 조준구가 얼마나 악독한지를 한 번 더 피부에 닿게 듣고 나니 공노인 내부의 호기심은 어쩌면 대의명분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이걸 어떻게 요리해 볼까. 오직 목표만을 향해 걸어가는 일은 무용하고 재미나다. 단편적인 숫자놀음을 뛰어넘어 내가 평생 갈고닦은 기술이 집약적으로 한 판 걸게 춤을 추는 자리다. 조준구가 갈취한 최참판댁 재산을 다시 되찾는 일. 공노인이 행하는 그 일은 본인 생의 가치를 집약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자리다. 일은 어쩐지 한 단계 넘어선다. 모든 과정의 세세한 순간순간까지 기획하고, 다시 되짚어보고, 조심조심 그렇지만 담대하게 그 판으로 걸어 들어가 나는 광대요 집행자이며 판관이다. 공노인은 얼마나 신이 났을까.


객줏집, 자기 집에 들어섰을 때, 그리고 마지막 보따리를 넘기고 난 지금 별안간 십 년, 이십 년을 한꺼번에 건너뛴 것 같은 노쇠한 자기 육신을 느낀다. 210p.


간 밤 꿈에 장기판을 들여다봤을 뿐인데 한 세월이 흘렀다 하는 얘기의 주인공처럼 스스로가 느껴졌을까.

공노인 평생의 가장 화려한 한 때가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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