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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Mar 12. 2024

신여성

토지 3부 2권, 통권 10권


변화는 빠르고 시절은 불우하다.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하는 청년들의 삶은 안타깝다. 이상현으로 대표되는 인텔리 지식인 청년들, 그들은 타고난 환경 덕에 신문물을 비교적 빠르게 받아들이고 교육받았다. 한 끼 밥 벌어먹고 돌아서 다음끼니를 걱정하던 식민지 조선의 평균적 삶과는 거리가 멀다. 조선 청년들에게 한꺼번에 들이닥친 철학사조는 독립의 길로 가는 여러 방편의 한 갈래였다. 배움의 단계는 개별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으나 유교적, 가부장적 환경에서 자란 남자들은 본인을 제외한 민중과 여성의 해방에는 회의적이기도 했다. 여러 철학적 사조를 받아들일수록 조선에서 두 발로 설 수 있는 영역은 식민지 지배하의 한계로 다가올 뿐이다. 


일본까지 건너가 신식 교육을 받았어도 여자는 이름을 드러내고 앞에 나서기 더 어렵다. 신여성, 임명희와 강선혜. 지금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충분히 혼자 독립적 인생을 살 수 있는 여자들, 시대가 허락하지 않는다. 여자는 결혼해야 했다. 처녀가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종속되지 않는 것은 집안의 수치였고, 스스로도 주홍글씨가 되었다. 개인의 자유와 사유는 결혼 앞에 거대한 벽을 만난다. 


하숙집으로 찾아온 임명희에게 이상현은 말했다. 


“나는 봉건시대의 퇴물입니다. 형편없는 구식 남자요. 데리고 노는 창부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아야 할 여자가 이런 무모한 짓 하는 것 좋게 볼 수 없소.” 47p. 


이상현의 발언은 당시의 사회상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아무리 부인을 두고 기화와 반쯤 살림을 차린 상태이긴 하지만 여염집 신여성 임명희를 차마 그럴 수는 없다. 임명희의 감정이 도드라지는 사랑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명희는 답답했다. 자신은 배웠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지만 사회적 구조 속에서는 가장 취약한 결혼하지 못한 처녀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고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이상현을 찾아간 명희의 행동은 자기 반역이다. 본인의 세계관 속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일탈, 스스로를 파괴하고 싶은 감정의 역치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고이다.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그 시대 여자가 할 수 있는 자기부정의 최대치 발현이다. 


토지 속 여성들은 시대상을 반영해 수동적인 인물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개척해 재산을 일구는 서희, 환경을 벗어나 자유롭게 성장하는 금녀 같은 인물이 유독 빛나게 느껴지는 것은 당대의 현실을 알기 때문이다. 여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굴레와 여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시대반역이다. 하물며 그 상황이 식민지라면 조선 여자의 계급은 아래에서도 더 아래에 위치할 뿐이다. 여성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나아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빛나는 이유이다. 


이혼하고 선언했다는 이유로 말로가 비참했던 천재 나혜석도, 세상을 품을 듯 자유롭게 춤추던 최승희도 여자가 자유롭지 못했던 한계 속에 스러질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빛나던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앞으로 조금씩 걸어왔다. 내가 지금 자유롭게 생각하고 이렇게 소리 내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는 그분들이 걸어온 세월의 증거이다. 내가 지나온 그들과 앞으로의 당신들에게 연대하는 방법은 여자로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들을 계속 사유하고 소리 내는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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