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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주씨 Mar 09. 2024

복수의 마지막

토지 3부 1권, 통권 9권 


복수는 허망한 것이었다. 서희는 조준구에게 돈 오천원을 건네주고 마음을 잡지 못했다. 어떻게 돌아온 땅이었나. 간도에서 버터온 시간들. 길상을 떠나보내고 아들 둘만 데려왔다. 땅은 공노인을 통해 거의 다 거둬들였다. 남은 것은 평사리 최참판댁. 집. 오욕의 세월을 회복하는 마지막 증거 같은 집. 최서희에게 집은 무슨 의미였을까. 


정작 진주에 터전을 잡고서도 서희는 기다렸다. 하긴 급할 것이 없었다. 근동에 그 집이 누구 집인지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까. 서울 번화가의 고래등도 아니고 누가 그 곳까지 집을 사러 올까. 지금도 종택은 함부로 거래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하물며 그 때라면 말 많고 사연 많은 그 집을 누가 탐을 낼까. 조준구가 최참판댁 만석꾼 재산을 탕진하는 동안 돌보지 않은 집은 쇠락해가고 있었을 뿐이다. 돌아오겠다는 집념, 조준구를 파멸시키겠다는 다짐으로 버텨온 세월이었다. 그 조준구가 눈 앞에 있다.


내가 최서희였다면 내 집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원수를 가만히 뒀을까? 조준구를 시원하게 한 대 치고 시작 했을텐데, 아니다 멍석말이라도 해야하나? 최서희는 어떤 마음으로 이 순간을 기다렸을까. 조준구는 손님이 아니였으므로 물 한 잔 내어주지 않았고, 오랜시간 기다리게 해도 상관없다. 방치하듯 행랑에 처박아놓고 좀 더 모욕을 줄 수도 있었으나 서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쩌면 서희는 막판에 가서 지쳤는지 모른다. 혹은 자포자기했는지 모른다. 돈 한 푼 없는 알거지가 된 조준구를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싸움을 끝내고 싶지가 않아서. 허망하게 쉽게 끝이 나버린 싸움, 너무 쉽게, 싱겹게 끝나버렸다. 가슴을 물어뜯듯 아우성치며 부풀었던 보복의 핏줄, 풍설의 북방에서 밤마다 날마다 다짐하였던 맹세가,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십 년은 더, 조준구의 숨통을 눌러놔야 했었다. 정녕 끝이 났는가. 231p.


조준구, 염치없고 추하고 뻔뻔한 인간. 최서희는 돈 오천원을 도박하듯 내 지른다. 그런 인사에게 일말의 양심을 기대한 건 어쩌면 서희가 오랜 시간 달려온 세월에 대한 보상을 기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재산은 일구었으나 친일파 소리도 들었고, 돌아오기 위해 길상과도 헤어졌다. 가까이 마음 나눌 사람 하나 없어 홀로 외롭다. 버텨온 세월이 한 순간에 서희를 관통하고 지나갔을까. 오직 이 한순간을 바라고 살아온 세월이 어쩐지 허망해 내가 세월을 버틴 값으로 오천원을 내놓았을까. 문장으로 다 풀어낼 수 없을 허망함과 분노가 휘날린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공허만 남았다.


인간이 황금으로 성을 쌓아올린들 그것이 무엇이라. 만년의 인간 역사가 무슨 뜻이 있으며 역발산 기개세의 영웅인들 한 목숨이 가고 오는데 터럭만큼의 힘인들 미칠쏜가. 230p.


 내 세계를 되짚어 읽고 다시 숨고를 수 있게 하는 방법, 간절한 것 하나쯤은 누구든 지녀야 하나보다. 가장 마지막 순간 나를 지금, 여기, 이곳에 묶어줄 수 있는 어떤 것, 실처럼 나부낄지라도 손잡을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하다. 습관처럼 경을 외고 불공을 드리며 마음을 다잡았던 날들이 지금의 서희에게 의지가 되고 살아야 한다는 당위를 버티게 한다. 무너지는 건 서희의 방식이 아니다. 꼿꼿하게 관통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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