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주씨 Mar 13. 2024

바닥 없는 그리움

토지 3부 2권, 통권 10권

여관 앞을 지나갈 때 차속에서 서희는 처음으로 여관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층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한 사내가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희는 갑자기 자신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상상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378p.


아버지가 오시지 않으면 자기도 가지 않겠다며 벽장 안에 숨어 앉아 울던 환국이를 달래다 서희는 울었다. 땅을 향한 집념으로 만주를 버티고 살아내 기어이 돌아오던 날 서희는 울었다. 숙명이란 이런 것일까. 내 땅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내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서희는 결심을 했었다. 그 굳은 마음이 자식 앞에서 무너졌다. 서희도 여자였고, 어머니였다. 당신을 용서치 않겠다 눈물로 다짐을 하는 마음은 그리움이다. 일생을 곁에서 버티어 준 사람이 사라지는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을. 


조준구에게 오천 원을 내어주고 복수를 마무리 짓고도 마음속에 불어오는 바람을 어찌하지 못했다. 아마도 서희의 마음에는 어쩔 수 없이 헤어지고 온 길상이 옹이처럼 맺혀있으리라. 간단히 풀어낼 수 없는 마음. 거기에 그가 있다 하는 마음으로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란 어쩌면 한없이 안으로 잦아드는 나를 버티는 일이겠다. 시간은 그래도 흐르고 아이들은 자랐다. 길상의 부재를 서희는 뼈아프게 느낀다. 환국이가 순철이를 때려 박외과에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던 날은 아마도 서희가 길상의 부재를 처음으로 소리 내 인정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혜관스님은 어쩌자고 효자동 어귀 선일여관을 이야기했을까. 진짜 거기에 길상이 있었을까. 혜관은 거기에 누가 있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여관이 있다고 권했다. 마음을 소리 내 부르고 나면 눌렀던 마음은 부피가 자라서 돌아온다. 꾹꾹 누르던 마음이 한 번 입 밖으로 나오고 나면 무르기가 쉽지 않다. 그때 바람처럼 스치는 길상이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서희를 사로잡았다. 당신 없이도 내가 여기로 돌아와 이렇게 버티고 있다는 마음이 서희를 여태 버티게 했을까. 그리움은 이렇게 힘이 세다. 기다릴 대상을 가진다는 건 외롭지만 일상을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허술한 틈으로 허술한 기대가 스며들면 부서진다. 그리움은 동시에 이렇게 허약하다. 


아무도 없는 창문, 실제 아무도 없었을 것이란 절망, 차가 멎었을 때 서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 379p.


얼마나 보고 싶을까. 

눈길 한 번 제대로 못주고 마음으로 버티며 여관 앞을 지나다니다 한 발 멀리 차를 타고서야 겨우 한 번 그렇게 바라다보는 마음이라니. 돌아와 환국이에게 아버지가 보고 싶냐 묻는 서희의 말이 아프다. 나도 네 아버지가 그립다 말할 수 없다. 서희의 방식이 아니다. 속이 타들어가 가루가 되었어도 그 가루를 반죽해 다시 안으로 켜켜이 쌓을 사람, 드러나는 건 겨우 얼마쯤의 그림자.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시다' 하는 말은 모자의 오랜 감정을 서로 보듬어 준다. 속 깊은 환국이는 어머니의 고독을 이해하고,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결핍은 아이를 성장시킨다. 그 성장이 가장 뼈아픈 사람도 서희 본인이다. 


그래도 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여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