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바빴던 때가 있었는지. 치열하게 살지 않는 보통 나는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버겁게 느껴졌다. 2학기는 더 그랬다. 뒤꽁무니서 아슬아슬하게 쫓아오던 과제들의 마감일과 사투를 벌이고 눈 앞을 깜깜하게 하던 시험들도 다 물리치고 나니 일요일 밤. 그래도 저지른 일, 주어진 일을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니까 그걸 꾸역꾸역 해내긴 했다. 배우자 p도 거의 1년을 준비한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다. 아직 합격 발표는 나오지 않았지만 채점한 결과로는 합격이 무난하다 못해 남는 점수였다.
한동안 공부하느라 속으로는 치열하고 서로에겐 무료했던 시간이 끝나고 월요일 저녁에는 기운이 넘쳤다. 엄마가 김장을 했으니 김치를 가져가라고 하셨다. 회사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p를 태워 날듯이 본가로 갔다. 엄마는 볼일이 있어서 밖에 다녀오느라 바빠서 챙겨 줄 밥이 없다더니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냥 김치만 받아가냐고 직접 수육을 사 오셨다. 김장 김치에 수육에 밥을 먹었다. 눈물 나게 맛있었다. 푹 익은 김치를 좋아하는데 그 김장 김치 앞에서야 취향이랄 게 없다. 말 그대로 밥을 퍼먹었다. 그러고도 양손 가득히 김치를 얻어왔다. 김치 얻으러 빈 손으로 와서 죄송하다 하니 엄마한테는 그래도 된다고 하셨다. 자식을 낳지 않기로 한 나는 평생 이해할 수 있을까. 부모 된 마음이라는 걸.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데 그냥 갑자기 이 평범한 보통 날을 기리고 싶어서 집에 돌아와서는 와인이라도 한 잔 마시자고 p를 꼬셨다. 학기를 마쳐서인지 이유 없이 기운이 솟았다, 정말로. 최근에 와인의 재미에 빠진 p는 솔직히 와인 맛도 잘 모른다. 나도 문외한인데 p보다 약간 더 미각이 예민하다는 이유로 항상 나에게 맛이 어떤지 물어본다. 그냥 나름대로 맛이 어떻다고 말한다. 어차피 중요하지도 않다. 그 날 저녁 마신 와인은 약간 시큼하고, 그러면서 물을 탄 듯이 밍밍한 맛이 났지만 적당히 독했다. P는 와인을 마시자는 내 말에는 항상 무조건 좋다는 대답뿐이다. 이 정도 되면 사실 p의 취미는 와인을 마시고 즐긴다기보다 와인을 사는 것뿐이고, 이 취미의 실질적인 수혜자는 나다. 둘 다 본가에서 저녁을 거창하게 먹고 왔지만 구색을 갖추기 위해 p는 새콤달콤한 카프레제를 만들어줬다. 하얀 치즈에 불그스름한 토마토에 달콤하고 새콤한 소스를 곁들인, 뷔페에 가면 10번이라도 가져다 먹는 그 음식.
둘은 곧 알딸딸해졌다. 취했다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런 상태였다. 와인을 마시면서 요즘 재미를 붙인 오디션 프로그램을 봤다. 나는 바닥에 앉아 있다가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아져 소파로 기어 올라가 거의 누웠고 p는 여전히 바닥에 앉아 텔레비전을 봤다. 참가자 두 사람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게 엄청 감동적이었다. 와인이나 취기가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이 감정을 고조시키더니 노래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눈물이 났다. 노래가 다 끝나고 눈물을 훔치면서 미동도 없는 p의 뒤통수에 대고 “여보, 나 눈물 나.” 했더니 p가 돌아봤다. “여보, 나도오오.”하는 p의 얼굴에 눈물이 흥건했다. 그걸 보니까 웃음이 팍 터졌다. “아니, 혼자 아무도 모르게 울고 있었던 거야?” 하니까 내가 또 이런 거나 보면서 운다고 뭐라 구박할까 봐 혼자 몰래 울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그런 걸로 구박을 했었나. 눈물 자국을 닦아주면서 서로 낄낄거렸다. P도 내가 울고 있는지 몰랐었단다. 본인 우느라 그리고 그걸 감추느라, 그 와중에 참가자들이 노래하는 걸 보느라 바빴을 거다.
기어이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는 침대에 누웠다. 그때까지도 여운이 가시지가 않아서 아, 좋은 무대였다, 멋있었다, 감동적이었다, 요 근래 본 것 중에 제일 좋았다, 하며 서로의 감상을 떠들었다. 와중에 내가 춥다고 하니 p가 날 껴안았다. 몸이 따뜻해지니까 곧 졸음이 밀려왔다. 떠들던 내가 말이 없으니 p가 잠으로 빠져 쌕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나도 곧 잠으로 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