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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 Jul 25. 2020

모리의 정원

소소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힐링

오직 키키 키린 배우가 출연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선택했던 영화 <모리의 정원>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키키 키린이 선택한 영화라면 기본 이상은 충분히 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이번 <모리의 정원> 역시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유방암 투병 끝에 2018년 생을 마감한 키키 키린의 유작으로 그녀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71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에서 정말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키키 키린은 일본의 국민엄마라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배우다.   

<태풍이 지나가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걸어도 걸어도> 등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페르소나라 말할 정도로 많은 영화를 함께 했다. 이 외에도 <일일시호일> <앙: 단팥 인생 이야기> <내 어머니의 인생> <도쿄타워> 등 수많은 영화에서 독보적인 키키 키린만의 어머니 연기를 펼쳤다.


어딘가 삐딱하면서도 어눌한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지혜가 녹아있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때론 관습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거부하는 연기를 펼치기도 했던 키키 키린! 어떨 때는 참 무뚝뚝해 보이고, 또 어떨 때는 정이 넘쳐 보이는 그녀만의 표정에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그런 그녀의 연기는 <모리의 정원>에서도 빛났다. 




영화의 줄거리는 정말 짧다.

허리가 굽을 정도로 나이 든 90대의 화가 모리가 그의 정원과 집에서 보내는 하루의 일상이 주요 내용이다. 무려 30년 동안 정원을 벗어난 적 없는 괴짜 화가 모리, 첨단 문명이 발달한 요즘 시대에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영화의 배경은 1974년 일본이다. 실존 인물로 일본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구마가이 모리카즈의 삶 중 어느 하루의 모습을 그렸다.


어찌 보면 뭐 이런 영화가 있어 라고 생각할 정도로 단순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참 묘하게 끌린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무는 모리의 정원은 모리가 만든 작은 세상이다. 그곳에서 모리는 그림에 대한 영감은 물론 삶의 지혜를 깨닫는다. 나뭇잎과 개미, 작은 돌멩이 등 지극히 작은 것들이 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리, 어쩌면 그것이 괴짜라 불리지만 천재성을 인정받은 화가 모리의 원천일지 모른다. 그리고 모리를 이해하고 응원하며 52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 히데코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에서 주는 국민문화훈장조차 받으러 나가는 것이 번거로워 수상을 거부하고 돈과 명예에 대한 관심 없이 자연주의 철학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부러웠다. 수많은 손님이 찾아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일상을 살아간다. 낮에는 정원에서 자연을 벗 삼아 지내고 밤에는 학교라 부르는 그만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리, 그리고 18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늘 모리의 곁을 지키는 아내 히데코. 



이 부부의 모습을 연기한 두 배우가 너무나 멋졌다. 티격태격하면서도 남편에 대한 사랑을 은은하게 드러내는 히데코 역할은 키키 키린 외에 대체할 배우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눈길을 사로잡았던 또 한 명의 배우가 있다. 94세의 괴짜 화가 모리카즈를 연기한 야마자키 츠토무다. 일본의 근현대 영화사를 쓴 전설적인 배우라는 평을 듣는다는 기사를 봤는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발의 도인 같은 모습으로 개미를 관찰하고 움튼 싹을 보며 감탄하는 모습이 화가 모리카즈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배우의 삶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야마자키 츠토무가 출연한 영화들을 찾아볼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아무 생각 없이 보게 되지만, 긴 여운이 남는 영화... 바로 <모리의 정원>이다. 

바쁜 현대인의 일상, 여유 없는 삶 속에서 쉬어감과 행복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를 슬로우 라이프 무비, 슬로우 힐링 무비라 부르는데 <모리의 정원> 역시 이런 슬로우 무비 중 하나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뭐 이렇게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가 있을까 생각할지도 모른다. 긴장감도 없고 특별한 스토리도 없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그 담백함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모리 부부가 보여주는 일상의 소소한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다. 특별한 일 없이 평범하게 흘러갔던 나의 시간들 역시 돌아보면 행복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화가 모리처럼 30년 동안 집과 정원을 벗어나지 않은 채 살아갈 자신은 없지만, 내가 있는 공간들과 내 곁의 사람들, 내가 보내는 이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기겠노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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