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일기 - 카자흐스탄

2004년 8월 6일

by ParOn

8월 6일 (금)

카자흐스탄에는 많은 인종이 살고 있다. 카자흐 원주민, 러시아인, 고려인, 우즈벡인, 독일인, 터키인 — 무려 150여 개의 민족이 한데 섞여 살아간다. 같은 피를 이어온 가족도 있지만, 여러 피가 뒤섞인 사람들이 더 많다. 러시아인과 고려인의 혼혈, 카자흐인과 고려인, 러시아인과 우즈벡인.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조합의 피가 이 땅에 흐른다. 생물학 시간에 배운 대로, 다른 피가 섞이면 우성의 형질만을 이어받는다고 했던가. 실제로 혼혈의 피를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외모가 빼어나다.


공산 체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의 바람이 불면서, 이곳 젊은이들은 서구의 자유로운 삶을 거침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억눌려 있던 것들을 마음껏 드러낸다. 저녁이면 시내 곳곳이 젊은 열기로 넘친다. 술집, 식당, 쇼핑몰, 나이트클럽 —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젊음이 차오른다.


이들은 감정의 표현에 주저함이 없다. 길거리에서, 식당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감정을 나누는 것을 거리낌 없이 한다. 그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없다. 어색함에 눈을 돌리는 건 나뿐인 것 같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참 다양하다. 흰 얼굴에 큰 키,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와 생김새 하나 다를 것 없는 고려인의 후손들, 구릿빛 얼굴의 인도계 사람들, 어느 피가 섞인 것인지 좀처럼 분간하기 어려운 얼굴들. 우리나라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이들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서로를 어색해하지도 않고, 서로의 피가 어디서 왔는지를 화두로 삼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자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통의 화제만을 놓고 이야기한다. 러시아인 여자와 고려인 남자가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키스를 나누는 모습도 이들에게는 전혀 낯선 장면이 아니다. 단지 사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일 뿐이다.


인종 간, 지역 간 갈등이 없다는 것이 이곳의 또 다른 특징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민족이 뒤섞여 사는 나라이니 갈등 또한 클 것이라 지레짐작했던 나의 선입관은, 그저 나만의 선입관이었다. 단일 민족임을 자랑스레 내세우면서도 정작 여러 형태의 갈등으로 앓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나라다.


오늘은 아침부터 화재 사건 대응 회의를 열었다. 설치 전문점 사장, 변호사, 관련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유쾌한 자리가 아니어서 내키지 않았지만, 피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다.


전문점 사장이 화재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사진을 이미 검토한 터라 설명 하나하나가 귀에 들어왔다. 그의 표정에는 억울함이 역력했다. 자신이 설치한 것으로 인해 막대한 배상 책임을 질 처지에 몰린 사람이었다. 우리 회사가 진상을 밝혀 자신이 큰 손해를 입지 않게 해달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변호사는 방금 건물주인을 만나고 왔다고 했다. 건물주인이 크게 화가 나 있고, 소송으로 갈 가능성도 높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그 처지라도 소송을 했을 것이다. 다만, 잘못의 원인이 건물 자체의 전기 배선에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런데 아직 아무도 그 가능성을 건물주인에게 꺼내지 않은 것 같았다.


소송에 대비할 준비를 해야겠다.

오후에 데니스가 낯선 사람의 명함을 가져왔다. 한국 분이었다. 오랜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닌 듯, 소개는 짧았다. 저녁에 함께 만나자고 했다.


타국에서 동포를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곳 알마티에서는 솔직히 한국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그리 달갑지 않은 경우를 여러 번 겪었다.


물론 직접 아는 분 중에는 좋은 분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주현 씨 부모님은 특별하다. 이곳에서 식품 가게를 운영하시는 분들인데, 처음 만남이 참 우연이었다.


지난 3월, 처음 출장을 왔을 때의 일이다. 호텔에서의 주말 무료함을 달래려 시내 구경을 나섰다. 이마트 규모의 쇼핑센터를 둘러보고, 전기선을 연결해 운행하는 트롤리버스를 탔다. 요금은 25텡게, 우리 돈으로 200원 남짓. 안내양도 있었다. 그다지 친절하진 않았지만, 어릴 적 기억 속의 버스 안내양이 문득 떠올랐다. 방향도 모른 채 버스에 몸을 실어 시내를 돌아다니다 어느새 호텔이 어디 있는지 감을 잃어버렸다. 아무 데서나 내려 근처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고, 종업원에게 호텔 이름을 알려주며 손짓 발짓으로 방향을 물었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익숙한 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방향이 틀렸다. 다시 길을 물어 돌아서서 걸었다. 날씨가 선선해 걷기엔 나쁘지 않았고, 가까이서 알마티를 들여다볼 수 있어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곳 아파트들이 외관 구조가 다 엇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거리도, 가로수도 비슷비슷해서 왔던 길을 다시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30분쯤 더 걸었을까. 길 모퉁이를 막 돌아서려는데, 고려인처럼 생기신 분이 서 계셨다. 영락없는 우리네 동네 아저씨 같으신 분이었다. 한국말을 하실 것 같다는 직감이 왔다. 대뜸 "혹시 한국 분이신지요?" 하고 여쭤보았다. 아저씨도 한국말 하는 사람을 만난 반가움이 얼굴에 역력하셨다. 친절하게 호텔 가는 길도 알려주셨다. (나중에 주현 씨를 통해 알게 된 일이지만, 다른 호텔을 알려주신 것이었다. 하마터면 헛걸음을 할 뻔했다.)


길을 알려주신 뒤 한국 얘기, 알마티 생활 얘기를 자연스럽게 나누었다. 회사 이야기가 나왔고, 내가 다니는 곳을 말씀드렸더니 따님이 거기 다닌다고 하셨다. 혹시 하는 생각이 스쳤는데, 막상 "우리 딸이 주현이"라는 말씀을 듣고는 잠시 황당함과 반가움이 뒤섞였다. 미처 거절도 못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일요일이라 편안한 옷차림이던 주현 씨가 당황해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주현 씨가 내온 과일과 차를 마시며, 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에 오신 지 9년이 됐다고 하셨다. 긴 세월 동안 자녀 교육을 이곳에서 다 마치고, 이제야 조금 자리가 잡혔다고 하셨다. 그간의 고생이 얼굴 곳곳에 배어 있었다. 문득 우리 아버지 얼굴이 겹쳤다.


그 뒤로도 아버님을 몇 번 뵈었다. 지난 6월, '우리식품'이라는 가게를 여실 때 회사 사람들과 함께 찾아가 축하도 드렸다. 뵐 때마다 환하게 웃으시는 분이다. 그리고 뵐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난다.


이곳 알마티에도 한국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사관에 등록된 교민만 7, 8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식당을 하시는 분, 가라오케를 운영하시는 분, 주재원으로 나와 있는 분들. 다른 나라에 비하면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타지에서 만나면 그 반가움은 숫자와 상관없다.


퇴근 후 집에 있는데 영노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 자리에 함께하기로 했던 친구였는데, 못 오겠다고 했다. 어젯밤 귀가하다 강도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 칼에 맞았다고 했다. 다행히 심하지 않아 병원 치료를 받고 집에서 쉬고 있다고 했다.


걱정이 앞섰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외국인을 상대로 한 강도 사건이 간간이 있다고 한다. 오늘 저녁 나도 늦게까지 돌아다닐 텐데 마음이 좀 불안했다. 그렇다고 총이나 칼을 들고 다닐 수도 없고, 강도를 제압할 무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삼십육계를 실행할 빠른 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개과천선을 이끌어낼 언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안 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이국의 밤을 소파에 누워 TV 채널이나 돌리며 보내는 것도 도저히 납득이 안 됐다. 다행히 함께 다닐 데니스와 그 친구들이 유도 선수 출신의 덩치들이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나가기로 했다.


저녁 늦게 데니스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려가 보니 차 안에 데니스와 한국 분 세 명이 있었다.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랐다.


향한 곳은 시내의 큰 식당이었다. 금요일 저녁, 알마티의 식당과 술집과 나이트클럽은 어디든 사람으로 가득 찬다. 우리 일행 열 명쯤이 들어갈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오려던 찰나, 마침 넓은 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일어섰다.


한국 분들은 이곳에서 투자 사업을 하시는 권 사장님과 그분의 고교 동문들이었다. 권 사장님은 물어보지도 않은 고등학교 이름을 먼저 꺼내며 동문임을 내내 강조하셨다. 동창의 끈끈함을 나누고 싶으셨던 것 같다. 두 분은 권 사장님의 초청으로 일주일 일정으로 여름휴가를 온 터였다. 머무는 내내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낮에는 골프와 관광으로 채웠다고 했다.


한 분은 용인 경찰대학에서 유도를 가르치시는 신 교수님이었다. 체구가 컸다. 말씀도 재미있게 하시고, 어설프지만 그 나름의 맛이 있는 영어도 구사하셨다. 86년 유도 아시아 챔피언이라고 하셨다. '사람 좋게 생겼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분이었다. 84학번이라니 나와 세 살 차이인데, 훨씬 연배가 있어 보였다. 나만 그렇게 본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랑 비슷해 보인다고 하더라니. 씁쓸했다. 또 다른 분은 서울에서 공인회계사로 일하신다고 했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말수가 적고 정이 가는 얼굴이었다.


보드카와 말고기, 말젖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마치고, 데니스 친구가 운영하는 나이트클럽으로 자리를 옮겼다.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이곳의 나이트클럽은 이 시간부터가 진짜다. 해가 늦게 지는 탓에 저녁 식사가 늦어지고, 클럽으로 이동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 시간대가 된다.


서울로 치면 강남 한복판의 클럽이었다. 주차장에는 외제차들이 가득했고, 이 나라에서 잘사는 집안의 젊은이들이 몰려오는 곳이었다. 클럽 사장과 데니스가 아는 사이여서 우리 일행은 입장료 없이 들어갔다. 한 사람당 2천 텡게, 열 명이면 16만 원이 넘는 금액이다. 돈의 액수를 떠나, 남들과 달리 그냥 들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어쩔 수 없는 속물인가 보다.


안은 젊음으로 가득했다. 스무 살 초반의 얼굴들이었다. 한국이었다면 나는 문 앞에서부터 막혔을 것이다. 일행은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큰 소리로 웃으며 금요일 밤을 즐겼다.


새벽 세 시가 가까워질 즈음,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는 말이 나왔다. 알마티 최고의 나이트클럽, '헤븐'으로 가자고 했다. 처음부터 그곳을 목표로 했는데 자리가 없어 이곳으로 왔던 것이고, 이제 자리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헤븐은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만 문을 연다. 찾아오는 사람들도 알마티의 부유층에 한정된다. 주차장의 차들은 같은 외제차라 해도 최고급, 최신형 모델들이었고, 스포츠카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서울에서는 이곳에 견줄 만한 곳에 가본 적이 없어 비교할 기준이 없었다.


새벽 세 시인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대부분 밤을 꼬박 새운다고 했다. 짧은 밤이 아쉬운 듯 맘껏 즐기는 모습들이었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 젊음이 이렇게만 흘러가도 괜찮은 것인가 싶은 마음도 들었다.


새벽 다섯 시가 넘어서야 일행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각에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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