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1) - 흙길 끝에서 시작된 세계
충청도 어느 시골 마을. 논두렁 너머로 하늘이 넓게 펼쳐지던 그곳에서 나는 태어났다. 대전이라는 도시를 처음 밟아본 건 초등학교 4학년 때가 유일했으니,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는 동네 골목과 친구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계절마다 다른 빛깔로 물드는 들판이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내가 쥐고 있던 지식이라고는 아버지의 한 마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름은 읽고 쓸 줄 알아야 학교에 간다." 그 말에 누나한테 붙들려 이름 석 자 겨우 익혔고, 숫자는 열까지 세는 게 전부였다. 유치원이란 것은 나와 무관한 세계였다.
그렇게, 봄날 아침 누나의 손을 잡고 낯선 길을 걸었다. 지금 돌아보면 열 분도 채 걸리지 않는 짧은 길이었지만, 그때의 나에게 그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먼 여정처럼 느껴졌다. 발밑으로 아직 이슬이 남아 있었고,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추운지도 구분하지 못한 채 그저 걸었다.
학교는 충격이었다. 좋은 의미의 충격.
책, 공책, 연필. 손에 쥐어본 적 없는 물건들이 내 앞에 놓였다. 선생님은 칠판 앞에 서서 글자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철수야 놀자', '영희야 놀자'. 그 말이 글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당연한 사실이 나에게는 작은 기적처럼 보였다. 수업 시간마다 새로운 것이 쏟아졌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배운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단순히 재미있는 수준이 아니라,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학교 갈 생각에 마음이 먼저 일어나는 그런 종류의 재미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같은 반에는 1년 유급하여 다시 1학년을 다니는 이웃 동네 형이 있었다. 그 형은 공부도 잘했고, 1학년 내내 학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는데, 어느 날 성적표를 받아보니 내가 줄곧 2등이었다. 이미 1년을 먼저 배운 형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2학년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둘 다 처음 배우는 과정이었고, 그제야 공부한 만큼 성적이 나왔다. 1등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성적 따위엔 무심했다.
훗날 어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그 형이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집에 돌아와 씩씩거리고, 때로는 울었다고 한다. 한 살 어린 동생한테 번번이 밀린다며. 그때의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세계에서도 자존심은 쉽게 다친다는 것을, 나는 한참 뒤에야 이해했다.
2학년 때의 기억 중 선명하게 남은 장면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벌을 선 날이다. 반 친구 중에 싸움을 자주 일으키는 아이가 있었다. 부반장이었던 나는 그 아이가 다른 친구를 괴롭히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결국 말다툼이 붙었고, 싸움 일보 직전까지 갔다. 다행히 다른 친구들이 말렸고,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그 소식은 담임 선생님께 전해졌다. 다음 수업 시간, 우리 둘은 칠판 앞에 나란히 서서 손을 들고 있어야 했다.
억울했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데 억울함보다 더 크게 느껴진 것이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교실 저편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서는 모습을 그 아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이, 억울함보다 훨씬 뜨겁게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손은 점점 무거워졌고, 창피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나는 그 친구와 세 번 크게 싸웠다. 6학년 때 한 번, 중학교 3학년 때 또 한 번. 묘하게도 우리는 그렇게 이어졌다가 끊겼다. 중학교 졸업 이후로 그 친구를 본 적이 없다.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가끔, 문득, 궁금해진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붙잡아 두고 싶어서다. 국민학교 시절의 기억은 이제 몇 조각밖에 남지 않았다. 그 조각들마저 언젠가는 안개처럼 걷혀 사라질 것이다. 흐릿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손에 잡히는 것들을 하나씩 여기에 옮겨 놓으려 한다. 그것이 지나간 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예의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