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비극이 2026년에 소환된 진짜 이유
지난 2월 4일 개봉한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 67일 만에 누적 관객 1628만 명을 돌파하며 역대 한국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다. 언론은 즉각적으로 흥행 요인을 분석했다. 설 연휴 특수, 유해진·박지훈이라는 검증된 배우 조합, 장항준 감독의 대중친화적 연출력, 그리고 단종이라는 비극적 서사의 보편성.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분석들은 표면을 긁었을 뿐이다. 1628만이라는 숫자가 단순한 영화의 완성도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은,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자명해진다.
정치적 격동이 만들어낸 집단적 감수성
2026년 현재, 우리는 비상계엄 선포부터 탄핵 정국, 공수처의 수사와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정치적 격동을 목도했다. 법리적 정당성이 정치적 압박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무력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대중은 묘한 무력감과 공포를 경험했다. 이 지점에서 단종의 비극은 단순한 역사가 아닌, 권력 앞에서 개인의 삶이 얼마나 취약하게 부서질 수 있는가에 대한 현재적 은유로 기능한다. 관객들이 스크린 속 16세 소년왕에게 그토록 뜨겁게 반응한 것은, 그 안에서 정통성을 빼앗긴 자신의 시대를 보았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영화 속 세조의 부재다. 세조는 영화에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는데, 이 결과 관객들이 단순히 영화를 관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 역사적 사건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해 세조의 무덤까지도 네티즌의 집단적 발길이 이어졌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라는 구조는 오늘날의 정치 지형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직접 등장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조종하는 권력자—이것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그 공백 안에서 각자의 '한명회'를 떠올렸다.
MZ세대의 참여문화가 흥행을 설계했다
2020년대 이후 영화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는 SNS 이용과 입소문의 전파가 가장 활발한 젊은 여성층을 공략하는 것, 그리고 이들이 과몰입할 수 있는 요소를 만들어 덕질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왕과 사는 남자'는 아이돌 출신으로 사전에 인지도를 쌓은 박지훈이 출연해 여성 관객층을 사로잡았고, 이를 실제 단종의 역사와 연관지을 수 있어 관람 이후의 이야깃거리를 다양하게 창출 가능하다는 특징이 빛을 발했다.
영월 관광과 단종 묘역 방문을 축제의 장으로 탈바꿈시킨 MZ세대의 참여형 문화는 콘텐츠 소비가 체험과 연대로 진화했음을 증명한다. '왕사남'은 단순히 극장에서 소비되는 영화가 아니라, SNS에서 공유되고, 역사 유적지에서 체험되며, 팬 커뮤니티에서 재생산되는 '살아있는 플랫폼'이 되었다. 이 생태계 안에서 관객들이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통곡상영회'까지 등장했다. 집단적 감정 해소의 공간이 된 극장은, 팬데믹 이후 단절된 공동체 경험을 갈망하던 대중의 욕구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롱런 흥행'이라는 구조적 혁신
이번 성과는 단순한 기록 경신을 넘어 한국 영화 흥행 구조의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로 해석된다. 과거 흥행작들이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관객을 끌어모았다면, '왕과 사는 남자'는 설 연휴를 기점으로 입소문을 타며 장기 흥행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오픈 스코어는 미미했으나 입소문이 퍼지면서 개봉 5일 만에 100만을 돌파했고 개봉 31일 만에 1000만을 넘어섰다. 첫 주에 폭발하고 급격히 추락하는 기존의 흥행 공식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이는 출세주의와 갑을 관계, 가족주의 등 기존 관념을 뒤흔드는 현대성을 영화가 투영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단종과 엄흥도의 관계가 주군과 신하의 수직 구조가 아닌, 밥상 앞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수평적 공동체를 보여준 것—바로 이 지점이 세대를 초월한 공감의 근원이었다.
결론: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다
'왕과 사는 남자'의 1628만은 단지 좋은 영화가 얻어낸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격동의 정치 현실 속에서 상실된 정의를 갈구하는 시대적 열망, 공동체적 감정 경험에 목마른 세대의 욕구, 그리고 SNS 시대 팬덤 문화의 진화가 교차하며 빚어낸 사회적 현상이다. 이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단종의 슬픔이 아니라, 빼앗긴 것들의 복원—정의, 원칙, 그리고 인간다운 관계였는지 모른다. 역사는 언제나 현재를 통해 다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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