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안 Feb 22. 2024

작년에 왔던 브로리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드래곤볼 슈퍼: 브로리 (2018)

 어린 시절에 큰아버지댁에 가면 매우 심심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던 시대도 아니었고, TV를 볼까 싶어도 리모컨은 항상 어른들의 손에 쥐어진 채로 흥미 없는 추석 특선 예능들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재미있었던 것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촌형의 방 책장에 있었던 드래곤볼 만화책이었다. 사촌형의 드래곤볼 컬렉션은 왜인지 '인조인간'편부터 '인조인간'편까지만 존재하여 나는 전후 관계도 잘 모르는 채로 인조인간 편만 몇 번을 반복하며 봐야 했지만, 재미라고는 찾을 수 없던 큰아버지댁에서 이는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기에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드래곤볼에 굉장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명작 중의 명작 인조인간 편

이제는 그만 쉬자 브로리야..

그런데 몇 년 전의 어느 주말, 오늘은 뭐 볼 거 없나 하고 OTT를 뒤져보고 있는데 한 영화가 눈에 보였다. 바로 [드래곤볼 슈퍼: 브로리]였다. 4DX로 상당히 재밌는 영화라는 소문을 들었어서 친구한테 보러 가자고 했으나 '대체 몇 번째 브로리냐'며 거절당한 영화였다. 사실 맞는 말이긴 했다. 내가 딱히 드래곤볼 극장판을 챙겨보거나 했던 것도 아닌데 우연히 채널을 돌리면서 본 브로리 극장판만 3종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아직도 '브로리라는 캐릭터에서 쥐어짜 낼 게 있나?'라는 생각으로 결제를 하게 됐다.


 영화를 보다가 알게 된 점은, 일단 이 영화의 브로리는 내가 알던 브로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의 브로리는 새로운 브로리다. 물론 영화 내용 자체는 기억 속에 희미하게 있는 브로리 극장판 1편을 닮은 스토리였으나 어찌 됐든 브로리라는 캐릭터를 새로 규정해나가고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원래의 브로리는 단순히 극장판용으로만 만들어져 있던 캐릭터여서 드래곤볼 원작 세계관에는 없는 캐릭터였는데, 이번 극장판을 기점으로 정식으로 세계관에 편입되면서 그 김에 설정을 싹 다 정리했다고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막상 이 영화에서 브로리가 누구이고 어떤 인물이고 어떤 내용으로 스토리가 흘러가는가에 대한 내용은 그렇게 중요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 영화를 보는 사람 중 그 누구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대단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제공하는 메인 재미는 숨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액션/전투씬이었다. 손오공 vs 브로리, 베지터 vs 브로리, 손오공+베지터 vs 브로리, vs 브로리, 프리저 vs 브로리, 오지터 vs 브로리에 이르기까지 전투가 영화 내내 계속 끊이질 않고 이어진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4dx로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 정말 아쉬울 따름이었다. 뭔가 감독이나 작가의 입장에서는 어떤 서사를 넣고 이를 진행하려는 욕심을 조금이라도 낼 수 있었을 텐데 이 영화에서 그런 욕심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거짓말 안 하고 정말 1시간을 넘는 시간 동안 싸움만 한다. 아무리 극장판이라고는 하지만.. 대체 얼마나 많은 인력이 갈아 넣어졌을지 상상이 안 가는 영화였다.


 예전에 친구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드래곤볼은 설정이건 스토리건 큰 틀에서 보면 대부분이 엉망진창인데 다들 '재밌다'라고 하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는 걸 보면, 어떤 콘텐츠가 '설정에 구멍이 있다'거나 '서사가 허술하다'와 같은 지적을 받는 건 그 콘텐츠가 일단 재미가 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딱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정말 드래곤볼스러운 영화였다. 대체 영화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하나도 모르겠지만, 왜인지 보기만 해도 재밌고 계속 몰입이 되는 영화. 가끔은 이렇게 머리를 비우고 단순한 오락적 유희만을 탐닉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전 02화 익숙하지만 사실 최근에 먹어볼 일 없던 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