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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끌 Oct 18. 2022

돌아가겠습니까?




몇 년 전 책 읽기 모임에서 누군가 질문했다.
"다시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어요?"
그날 모임엔 원래 있던 20대 한 명이 나오지 않아서 30대 이상만 있었다. 그의 질문에 모인 사람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난 안 돌아갈래요!"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외쳤다.
"나도!"
"나도!"
단 한 명도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나는 한 번도 그런 가정을 해본 적 없어서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모임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 인생에 만족하기 때문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좀 다른 이유다. 지금 삶에 큰 불만은 없지만 돌아가서 살아갈 나날이 지루하게 느껴져서다. 돌아가도 계속 같은 선택을 하고 같은 삶을 살 것만 같았다.


이번 삶이 후회 없는 선택으로 이뤄져서 같은 선택을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때 그때 즉석에서 결정했기에 내 본능은 다시 돌아가도 마가지일 것 같다. 돌을 나르는 일을 끝없이 반복하는 시시포스저럼 이 세계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만약 20대에 내가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한다면? 새로운 분야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해외에서 일을 하며 외국인 친구를 여럿 사귀고, 외모도 지금보다 근사하게 꾸며 멋진 연인을 만난다면? 그렇다면 인생을 다시 살아볼 가치가 생기지 않을까? 적어도 외부 조건에선 어릴 적 꿈꿨던 '그 사람'으로 내가 살아간다면? 그럼 돌아갈 만하지 않을까?    


*


며칠 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 원스>를 봤다. 이 영화는 선택에 관한 영화(혹은 가족 영화)다. (다음 내용은 약간의 스포가 있지만 영화를 관람하는데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묘미는 '황당함'에 있으므로.)

주인공 에블린(양자경 역)은 젊은 시절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편을 '선택'했다. 둘이 즐거운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 에블린은 폐업 기로에 선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고, 남편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 세금 처리도 잘못되어 있어서 세무공무원을 만나러 가는 길. 국세청 엘리베이터 안에서 에블린은 멀티버스(다중우주)를 경험한다. 다른 우주에서 에블린은 유명 배우, 수석 셰프 등이 되어 있다.


에블린은 남편에게 다른 우주 속 남편 없는 삶이 좋았다고 외친다. 에블린은 다른 삶을 살고 싶은 걸까? 난 에블린이 멀티버스 속 다른 삶을 사는 자신을 보는 장면을 조금 슬프 보았다. 그 우주들은 현실에스트레스 극도로 받고 있는 에블린의 정신착란을 은유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망가고 싶은 꽉 막힌 현실에서 나를 구원해줄 것은 무엇일까? 다른 우주에 자신은 화려한 삶을 사는 배우인 걸 안다면 얼마나 위안이 될까?

아는 분이 조현병을 겪었다. 그는 자신의 발병 때를 이렇게 표현했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천장이 열리고 누군가가 말을 하더라고.

"너는 우주를 이끄는 사람이다!"

당시 그의 현실은 비루하기만 했다. 그분이 떠올라 영화를 마냥 즐겁게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조현병처럼 극단적 사례까진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고 믿고 상상할 때가 많다. 그럴 때 이곳이 아닌 어디든 찾는다. 우리가 여행을 즐기는 이유는 현실 우주를 벗어난 기분이 들기 때문다. 여유가 있으면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좋다. 서울에서 산다면 제주도로, 더 여유가 있으면 해외로, 백만장자라면 지구를 떠난다. 내 삶의 상흔이 가득한 이곳을 멀리 떠나.

그러나 어린 아이들, 재정 상황, 병든 부모 등 속세 조건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상상한다. 20세기엔 천국을, 21세기엔 다른 우주를.


우리가 다른 우주를 찾는 건 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요즘 영화에서 그토록 많은 멀티버스, 다중우주가 나오는 이유는 21세기 들어 신이 우리 삶에서 없어졌거나 옅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 때문이 아니다. 우리 삶에서 신이 옅어진 이유는. 과학 발달 때문도 아닌 것 같다. 전쟁, 폭력 등을 겪거나 미디어에서 접하다 보니 유일신의 능력이 보이지 않아서다.


물론 여전히 신을 믿고 있는 이들은 많고 그들의 믿음이 비과학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 삶에 설명할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을 전에는 종교로 설명했다면 요즘 군가는 '과학이란 믿음'으로, 누군가는 '종교란 믿음'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과학이란 믿음'을 갖는 이들의 근거는 21세기에야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21세기에 과학자들은 말한다. 태초에 우주가 빅뱅으로 생겨날 때 또 다른 우주도 생겨났다고. 그러니 멀티버스가 허무맹랑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의 나는 자주 비참해지고, 어딘가 떠나기도 쉽지 않다. 현실의 고단함을 위로해줄 또 다른 세계가 전에는 천국이나 윤회였다면 이제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대체품이 있어야 했다. 그것이 멀티버스다. 천국을 불러내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내가 사는 또 다른 세계가 어딘가에 있고, 현실과 달리 다른 삶에선 내가 행복할 것이란 기대가 있다.



*



딱히.
생각을 해봤는데 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삶을 살더라도 딱히 돌아가고 싶지가 않다. 삶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나일 것이다. 20대로 돌아가서 살아가는 내가 지금의 내 성향, 성격과 다르다면 그는 내가 아니므로 돌아갈 의미가 없고, 나와 유사하다면 또 다른 나도 역시 비슷한 패턴의 실수를 연발하고, 비슷한 스트레스를 받고. 감정조절에 미숙한 것까지 여전할 게 아닌가.

'다시 살아도 나는 여전히 바보구나, 여전히 용기가 없구나, 여전히 게으르구나!'

이런 깨달음이 더 서글플 것 같다. 내가 싫은 게 아니다. 나는 나와 정이 많이 들었다. 그저 내가 또 겪을 패턴이 반복되는 일이 두렵다.



20대로 돌아가서 살아가는 내가 지금의 내 성향, 성격과 다르다면
그는 내가 아니므로 돌아갈 의미가 없고,
나와 유사하다면 또 다른 나도 역시 비슷한 패턴의 실수를 연발하고, 비슷한 스트레스를 받을 것 아닌가.



20대로 돌아가서 살아가는 내가 지금의 내 성향, 성격과 다르다면
그는 내가 아니므로 돌아갈 의미가 없고,
나와 유사하다면 또 다른 나도 역시 비슷한 패턴의 실수를 연발하고, 비슷한 스트레스를 받을 것 아닌가.


멀티버스 속 다른 선택을 해서 화려한 삶을 사는 나를 누려보고 싶은 유혹도 있지만 그래 봤자 나다. 다른 우주를 꿈꿀 바에야 이 세계에서 두 발을 디디고 한 번씩 영화처럼 '의외의 선택과 행동'을 하면서 재미를 누리고 싶다. 맨날 나르던 돌을 깨버려야지. 과거로 돌아가는 생각 따위 없애고, 그냥 지금 떠나버리지. 곽진언의 <나랑 갈래?>를 들으며 세상으로부터 도망쳐야지.


그래도 살아가는 동안 스트레스가 너무 심한데 떠날 수 없다면 그 자리에서 티끌이 되기로 한다. 아주 작아진 나를 상상하면 이곳의 상흔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된다. 내게 멀티버스는 티끌이 된 세계다. <매트릭스> 네오가 세상을 알게 되자 세상이 프로그램으로 보이듯 티끌이 되면 세상은 티끌이 된다. 티끌이 신이고 티끌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다. 오늘도 티끌이 되었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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