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물었다. 그는 자산은 심리 위기를 겪을 때 도움이 되는 것들을 말한다고 했다. 내 기분을 풀어주는 것들은 다 자산이 된단다. 아주 작은 것들도 모두.
집에 돌아와 자산을 적어봤다. 하나하나. 기뻤던 순간, 행복했던 순간, 스트레스가 풀리는 순간, 좋아!라고 외친 순간들을. 그리고 선생님이 점수를 매기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순전히 재미로 점수도 매겨보았다. 난 이런 소소한 재미를 추구하니까. 100점 만점 기준이다.
- 딸기 송송 가득 박힌 생크림케이크를 먹을 때(51점)
- 잃어버린 줄 알았던 양말 한 짝을 찾았을 때(11점)
- 자정 무렵 심심해서 들어간 편의점에서 1+1 상품을 살 때(18점)
-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내 앞에 자리가 날 때(21점)
-내가 좋아하는 딸기케이크 집에 친구를 데려갔는데 친구도 좋아해줄 때(57점)
- 어릴 때 친구와 옛날 이야기하며 웃을 때(33점)
- 지금처럼 재밌는 리스트를 적을 때(7점)
- 회사에서 나와 걸을 때, 허기진 상태에서 밥 먹을 때 ...
금세 70개를 넘게 적었다. 리스트를 보며 갸우뚱거렸다. 이렇게 자산이 많은 사람인데 왜 힘들어 했을까. '티끌모아태산'이라고 이런 자산을 자주 축적해나가면 나 같은 티끌도 누구보다도 부자가 될 것 같았다. 자산 점검도 했으니 이젠 우울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음날 반대 경우를 적어봤다. 이내 내가 얼마나 취약한 상태에 있는지 알았다. 내 자산을 하루아침에급락하는비트코인처럼 만드는 자산 파괴범들을 적어나갔다. 상담선생님이 자산 파괴범들까지 생각해 보라고 한 적 없지만 이번에도 재미로 적어 나갔다.
- 무슨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기대하며 읽었지만 내 취향이 전혀 아닐 때(-27점)
- 좋아하는 강아지 유튜브의 업로드 주기가 늦어질 때(-8점)
- 모처럼 끓인 라면의 물이 너무 많을 때(-17점)
- 펀딩하고 한 달 기다려 받은 제품이 맛대가리 없어 사기당한 것 같을 때(-33점)
- 성폭행 뉴스를 접할 때(-47점)
- 설거지감이 쌓여 날파리가 날라다니는 걸 보고도 할 의욕이 없을 때(-66점)
- 생리 둘째 날(-62점)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을 때(-90점)
- 몸이 안 좋은 걸 알았을 때(-90점)
-누군가 나에 관한 거짓말을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을 때(-91점)
- ...
쓰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이 앞으로도 급락과 급등을 널뛰기하기 쉽다는 사실을.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 상태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90과 -66이 만나긴 쉽다. -62와 -91이 만날 수도 있었다. 더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간다. 자산목록을 꺼내에 서둘러 다시 채워놓아야 하겠지만 이미 구덩이에 떨어진 상태에선 누구를 만날 수도 없고, 무언가를 할 힘도 없다. 이미 나는 내가 떨어지는 광경을 목도했다.
때론 발버둥을 치기도 했다. 미리 좋아하는 것으로 막아두었다. 딸기케이크를 두 조각씩이나 먹고 난 후 볕 좋은 날 산책을 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미봉책일 뿐.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기거나 생리 둘째 날이면 어김없이 자산은 하한가를 쳤다. 등락폭이 너무 컸다. 위에서 생리 둘째날 -62점이라 적었다. 이 숫자는 많이 낮아진 수치다. 몇 달 전까진 1.5배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날 무슨 일이 하나 더 생기면 나는 한 번도 내려가지 않은 지점까지 땅굴을 팠다.
수치스런 기억이 있다. 생리혈이 샌 적이 있었다. 한 번이 아니다. 바지에 묻다니. 의자에 묻히다니. 사회생활하는 사람에게 있어선 안 될 일이라 여겼다. 그래서 생리 둘째 날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이런 스트레스를 받고도 매달 그날이 오면 어쩔 수 없다 내버려두고 자포자기했다. '오버나이트' 사이즈를 두세 시간마다 갈아도 안 되는 걸 어쩌겠나. 최근엔 자포자기하는 마음을 바꿨다. 몇 차례 테스트 끝에 괜찮은 속옷을 구했다. 여름엔 많이 덥고 뚱뚱해 보이지만 이젠 전보다 안전할 것 같다. 지난 두 달은 생리 둘째날 스트레스 수치가 전보다 낮아졌다. 그리고 이젠 새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미 부끄러운 일은 다 겪었으니까, 괜찮다. 뭐, 어때.
전엔 우울할 때면 니체를 떠올리곤 했다. 니체가 말하듯 스스로 하강하는 자는 언젠가 올라올 거라고, 더 깊은 지하를 파고 드는 내 무기력에 안주했다. 내가 초인처럼 '스스로 하강하는 자(몰락하는 자)'가 되는 줄 알고 더 세게 맞았다. '이런 경험을 겪으면 멋지게 성장하겠지.'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건 착각이었다. 나는 스스로 몰락한 게 아니라 뜻하지 않은 상황이 자꾸 벌어져서 몰락당하고 있었다. 그런 몰락을 내버려둔다면 빠져나올 수 없다. 누군가 파놓은 깊은 구덩이에 빠졌는데 어찌 홀로 올라올 수 있을까. 그럴 땐 곁을 지나는 누군가에게 손을 뻗고 소리를 질러서 살려달라고 외쳐야 했다.
나는 스스로 몰락한 게 아니라 뜻하지 않은 상황이 자꾸 벌어져서 몰락당하고 있었다. 그런 몰락을 내버려둔다면 빠져나올 수 없다.
가끔은 도무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맷집 강한 사람을 만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스트레스가 - 30을 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지만 당장 그런 사람이 되지는 못할 터라 미리 애쓰고 싶다. 새어나가지 않는 속옷을 마련하는 것처럼. 지난해 말부터 올해 상반기엔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벽돌을 맞고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언제 또 세찬 빗방울이 정도가 아니라 벽돌이 떨어져 내릴지도 모른다. '그럴 땐 머리를 가리고 최대한 몸을 낮춰서 덜 다치도록 노력해야지, 만약 구덩이로 굴러 떨어지면 밖에 있는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지.' 다짐한다.
내 자산 중엔 운동도 있다. 난 운동신경이 둔하지만 운동하며 땀 내는 걸 즐긴다. 어느 땐 운동 자산이 70점이 훌쩍 넘는 것 같다. 몇 년 전 격투기를 배웠다. 격투기는 두 발 스탭이 중요하다. 리듬감과 힘이. 상대와 맞설 때면 두 발을 땅에 단단히 힘주어 딛고 춤추듯 스탭을 밟는다. '슉슉, 슉슉.' 그러니까 격투기 스탭을 하듯 자산이 떨어질 것 같을 때마다 요리조리 강펀치를 피할 생각이다. 그러다 맞으면 말한다.
'슉슉!, 다 덤벼라, 슉슉! 지금 쳤냐? 슉슉! 난 여기서 져도 죽지 않아. 집에 가서 딸기케이크 먹을 거야! 슉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