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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끌 Oct 14. 2022

몰락하는 자의 자산 목록

심리상담 선생님은 내게 자산을 잊지 말라, 고 했다.

"자산이요?"

가 물었다. 그는 자산은 심리 위기를 겪을 때 도움이 되는 것들을 말한다고 했다. 내 기분을 풀어주는 것들은 다 자산이 된단다. 작은 것들도 모두.


집에 돌아와 자산을 적어봤다. 하나하나. 기뻤던 순간, 행복했던 순간, 스트레스가 풀리는 순간, 좋아!라고 외친 순간들을. 그리고 선생님이 점수를 매기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순전히 재미로 수도 매겨보았다. 난 이런 소소한 재미를 추구하니까. 100점 만점 기준이다.


- 딸기 송송 가득 박힌 생크림케이크를 먹을 때(51점)

- 잃어버린 줄 알았던 양말 한 짝을 찾았을 때(11점)

- 자정 무렵 심심해서 들어간 편의점에서 1+1 상품을 살 때(18점)

-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내 앞에 자리가 날 때(21점)

- 내가 좋아하는 딸기케이크 집에 친구를 데려갔는데 친구도 좋아해줄 때(57점)

- 어릴 때 친구와 옛날 이야기하며 웃을 때(33점)

- 지금처럼 재밌는 리스트를 적을 때(7점)

- 회사에서 나와 걸을 때, 허기진 상태에서 밥 먹을 때 ...


금세 70개를 넘게 적었다. 리스트를 보며 갸우뚱거렸다. 이렇게 자산이 많은 사람인데 왜 힘들어 했을까. '티끌모아태산'이라고 이런 자산을 자주 축적해나가면 나 같은 티끌도 누구보다도 부자가 될 것 같았다. 자산 점검도 했으니 이젠 우울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음날 반대 경우를 적어봤다. 이내 내가 얼마나 취약한 상태에 있는지 알았다. 내 자산을 하루아침에 급락하는 비트코인처럼 만드는 자산 파괴범들을 적어나갔다. 상담선생님이 자산 파괴범들까지 생각해 보라고 한 적 없지만 이번에도 재미로 적어 나갔다.


- 무슨 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기대하며 읽었지만 내 취향이 전혀 아닐 때(-27점)

- 좋아하는 강아지 유튜브의 업로드 주기가 늦어질 때(-8점)

- 모처럼 끓인 라면의 물이 너무 많을 때(-17점)

- 펀딩하고 한 달 기다려 받은 제품이 맛대가리 없어 사기당한 것 같을 때(-33점)

- 성폭행 뉴스를 접할 때(-47점) 

- 설거지감이 쌓여 날파리가 날라다니는 걸 보고도  의욕이 없을 때(-66점)

- 생리 둘째 날(-62점)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을 때(-90점)

- 몸이 안 좋은 걸 알았을 때(-90점)

- 누군가 나에 관한 거짓말을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을 때(-91점)

- ...


쓰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내 마음이 앞으로도 급락과 급등을 널뛰기하기 쉽다는 사실을.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 상태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90과 -66이 만나긴 쉽다. -62와 -91이 만날 수도 있었다. 더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간다. 자산목록을 꺼내에 서둘러 다시 채워놓아야 하겠지만 이미 구덩이에 떨어진 상태에선 누구를 만날 수도 없고, 무언가를 할 힘도 없다. 이미 나는 내가 떨어지는 광경을 목도했다.


때론 발버둥을 치기도 했다. 미리 좋아하는 것으로 막아두었다. 딸기케이크를 두 조각씩이나 먹고 난 후 볕 좋은 날 산책을 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미봉책일 뿐.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기거나 생리 둘째 날이면 어김없이 자산은 하한가를 쳤다. 등락폭이 너무 컸다. 위에서 생리 둘째날 -62점이라 적었다. 이 숫자는 많이 낮아진 수치다. 몇 달 전까진 1.5배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날 무슨 일이 하나 더 생기면 나는 한 번도 내려가지 않은 지점까지 땅굴을 팠다.  


수치스런 기억이 있다. 생리혈이 샌 적이 있었다. 한 번이 아니다. 바지에 묻다니. 의자에 묻히다니. 사회생활하는 사람에게 있어선 안 될 일이라 여겼다. 그래서 생리 둘째 날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이런 스트레스를 받고도 매달 그날이 오면 어쩔 수 없다 내버려두고 자포자기했다. '오버나이트' 사이즈를 두세 시간마다 갈아도 안 되는 걸 어쩌겠나. 최근엔 자포자기하는 마음을 바꿨다. 몇 차례 테스트 끝에 괜찮은 속옷을 구했다. 여름엔 많이 덥고 뚱뚱해 보이지만 이젠 전보다 안전할 것 같다. 지난 두 달은 생리 둘째날 스트레스 수치가 전보다 낮아졌다. 그리고 이젠 새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미 부끄러운 일은 다 겪었으니까, 괜찮다. 뭐, 어때.


전엔 우울할 때면 니체를 떠올리곤 했다. 니체가 말하듯 스스로 하강하는 자는 언젠가 올라올 거라고, 더 깊은 지하를 파고 드는 내 무기력에 안주했다. 내가 초인처럼 '스스로 하강하는 자(몰락하는 자)'가 되는 줄 알고 더 세게 맞았다. '이런 경험을 겪으면 멋지게 성장하겠지.'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건 착각이었다. 나는 스스로 몰락한 게 아니라 뜻하지 않은 상황이 자꾸 벌어져서 몰락당하고 있었다. 그런 몰락을 내버려둔다면 빠져나올 수 없다. 누군가 파놓은 깊은 구덩이에 빠졌는데 어찌 홀로 올라올 수 있을까. 그럴 땐 곁을 지나는 누군가에게 손을 뻗고 소리를 질러서 살려달라고 외쳐야 했다.



나는 스스로 몰락한 게 아니라 뜻하지 않은 상황이 자꾸 벌어져서 몰락당하고 있었다. 그런 몰락을 내버려둔다면 빠져나올 수 없다. 



가끔은 도무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맷집 강한 사람을 만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스트레스가 - 30을 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지만 당장 그런 사람이 되지는 못할 터라 미리 애쓰고 싶다. 새어나가지 않는 속옷을 마련하는 것처럼. 지난해 말부터 올해 상반기엔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벽돌을 맞고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언제 또 세찬 빗방울이 정도가 아니라 벽돌이 떨어져 내릴지도 모른다. '그럴 땐 머리를 가리고 최대한 몸을 낮춰서 덜 다치도록 노력해야지, 만약 구덩이로 굴러 떨어지면 밖에 있는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지.' 다짐한다.


내 자산 중엔 운동도 있다. 난 운동신경이 둔하지만 운동하며 땀 내는 걸 즐긴다. 어느 땐 운동 자산이 70점이 훌쩍 넘는 것 같다. 몇 년 전 격투기를 배웠다. 격투기는 두 발 스탭이 중요하다. 리듬감과 힘이. 상대와 맞설 때면 두 발을 땅에 단단히 힘주어 딛고 춤추듯 스탭을 밟는다. '슉슉, 슉슉.' 그러니까 격투기 스탭을 하듯 자산이 떨어질 것 같을 때마다 요리조리 강펀치를 피할 생각이다. 그러다 맞으면 말한다.

'슉슉!, 다 덤벼라, 슉! 지금 쳤냐? 슉슉! 난 여기서 져도 죽지 않아. 집에 가서 딸기케이크 먹을 거야! 슉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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