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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끌 Oct 22. 2022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죽어가는지 모른다

가령,

출혈로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상처가 크지 않아 보여도. 피를 흘리고 흘리다 보면 쇼크가 오고 곧 그는 죽음에 다가간다. 손상으로 인한 사인死因 중엔 과다출혈 사망이 가장 많다. 누군가 다쳐서 죽었다면 그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일 가능성이 높다. 사망자는 피를 흘리는 순간에 자신이 5분 내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을까? 아닐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죽어가는지 모른다.


가끔,

한 남자를 떠올린다. 출근길에 어이없 죽은 남자. 기사로만 접했지만 직도 생생하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회사에 늦는다고 연락해야 한다'였다. 죽기 직전까지 의식이 있었던 그는 곧 자신이 허무하게 죽는 걸 알았을까? 아니었을 것 같다. 그는 겉으론 손상을 모르는 내장 파열로 인해 죽었다.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죽음을 몰랐던 출근하는 남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죽음에 방관자로 죽어간다.


간혹,

궁금하다. 뇌졸중으로 투병하다 죽은 내 아버지는 2시간 후에 정신을 잃을 걸 예감했을까? 그러지 않았을 것 같다. 그날은 날이 좋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산행을 다녀왔다. 자세한 이야기를 쓰기엔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나는 아버지가 투병하다 깨끗이 나아서 종편 다큐에 나오는 어르신들처럼 성공스토리를 쓰는 걸 꿈꾸곤 했다. 하지만 작은 조짐조차 없었고 나는 낫지 않는 아버지에게 실망했다. 아버지의 피나는 의지가 부족하다 여겼기 때문에 번번이 '실망'했다. 딸에게 실망만 주던 내 아버지는 5년 투병 끝에 사망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죽음이 언제 올지 모른다.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죽어가는지 모른다. 모두가 죽어가고 있지만 죽어가는 시간과 양상은 각자 다르다. 몸 속에 암이 져가고 있는지, 혈관이 막히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2년마다 있는 건강검진으로 발견하면 다행이지만 대부분 갑자기 음 선고를 게 된다. 한 순간에 양자도약처럼 인생이 위로 점프하기도 하지만, 아래로 몇 단계 추락할 수도 있다. 추락 1초 전에도 추락 순간에도 자신의 죽음을 모를 가능성이 크다.


우울이 자신을 어떻게 죽이고 있는지 모른다. 다치는 것처럼 원인이 분명하지 않으니, 우울이란 판명도 쉽지 않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동안 몸은 더 스트레스를 받고 아래로 추락하고 있다. 어딘가 아픈데도 원인을 모르겠다. 럴 때 한 번쯤 생각한다. '나 지금 우울한가? 혹시 우울 때문인가? 아니 그냥 잠시 다운된 거겠지.'


우울이 어떻게 자신을 죽이고 있는지 모른다



황당한 질문 하나. 혹시 바나나맛우유를 지겨워질 때까지 먹어본 적 있는지?


난 한 번 빠지면 지겨워질 때까지 한다. 한 달 정도를 기한으로 삼아 과하게 밀어 넣고 끝낸다. 어떤 물쏘기 온라인 게임을 15시간 동안 해서 하루 만에 끝내고, 바나나맛우유가 좋을 땐 이 우유를 하루 세 개 넘게 두 달 동안, 콜라가 좋을 땐 콜라를 하루 세 캔씩 한 달 동안 마셨다. 마침내 내 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만든다. (이 집착이 먹는 것이나 노는 것에 한정되어서 아직 성공을 못했다.)


이렇게 하는 건 바나나맛우유에, 콜라에, 게임에 '빠진 나'를 지겨울 만큼 충분히 느끼기 위해서다. 기억하고 잊지 않으려고 그런다. 이젠 바나나맛우유를 일 년에 하루 정도 누군가 줄 때만 마시지만, 아직도 그 맛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견딜 수 없이 지겨워져서 끝!을 외치면 더 이상 찾지 않는다. 사랑할 때도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랑을 퍼준다. 실망할 일이 생겨 헤어지면 뒤돌아보지 않았다. (사랑할 때는 상대보다 덜 사랑한 사람이 손해다. 덜 사랑하면 미련과 후회가 남는다.)  


우울은 이것이 쉽지 않다. 깊이 느껴도, 지겨워져도 다시 찾아온다. 그래도 자주 빠지지 는 방법은 우울 왔을 때 충분히 느끼는 것이다. 천천히 감각하는 것이다. 아닌 척하지 않는 것이다. 더 세게 우울하란 의미가 아니라 마음으로 충분히 느끼란 의미다.


우울에게 왔냐고 인사하자. 이번 우울은 누가 왔는지, 어떤 모양인지, 어떤 온도인지를.

안녕, 내 푸르른 우울아! 거기서 이제 좀 나오렴.

안녕, 내 예쁘장한 우울아! 오늘은 더 새초롬하구나.

안녕, 내 최고못난이 우울아! 이번엔 참 못생긴 애가 왔구나. 그런 표정은 더 못생겨 보인단다.


내 우울은 귀신이 몸에 붙은 것과 비슷했다. 실제 귀신이 몸에 붙은 적은 없지만 마치 그런 느낌이랄까? 이 형체도 없는 이상한 것은 땀 흘리며 뛰어도 잘 안 나가고, 두시간을 걸어도, 바쁘게 일을 해도 잘 안 나갔다. 이런 노력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서 나갈 때도 있지만, 이번엔 금세 돌아왔다. 모든 일이 조금씩 안 되고, 조금씩 어딘가가 아팠다.  


내게는 '내가 우울할 리 없어!' 란 환상이 있었다. 나는 낮엔 웃고 밤엔 울적해했다. 잠시 무기력한 것일뿐 내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단단하고 재밌는 사람인데 내가 왜?' 

아니, 나는 단단한 사람일 수도, 나약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내 마음은 호수요', 란 옛 가곡 가사처럼 사람 마음은 이 상태도 저 상태도 되는 물이었다.


무기력 정도가 아니라 이건 우울인가? 느꼈을 땐 하루 빨리 자가치료를 하려했다. 하지만 낫기도 힘들다. 귀신이 몸에 붙은 것과 비슷한데 스스로 치료할 수 있을까? 귀신으로 은유했지만 우울증의 뇌는, 일반인과 뇌와 다르단다. 당연히 호르몬 분비도 다르다. 런 상태인데 노력하면 쉽게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거만한 거다. 우울은 내 잘못이 아니지만, 계속 우울한데도 누군가에게 SOS를 하지 않는 것은 내 잘못이다. 친한 친구도 좋고, 병원이나 심리지원센터에 찾아가서 떠드는 것도 좋다. 


귀신이 붙은 사람들은 (신이 하는) 말을 중얼중얼거리면서 몸에 갇힌 억눌린 것을 푼다고 한다. 정말 신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심리 상담과 원리가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무당 앞에 수많은 말을 한꺼번에 쏟아내면 얼마나 심리 치료 효과가 생길까? 하고 나면 몸이 가벼워질 것이다, 다 쏟아냈으니까. 나도 방백을 하듯 심리상담사 앞에서 말을 쏟아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여름 심리지원센터를 찾아갔다. 난 평소 말수가 적은 편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대개 듣는 쪽이다. 그런 내가 떠들려니 얼마나 어색하던지. 참고 떠들어댔다. 다섯 번 째만이었다. 몸에 붙은 귀신처럼 나가지 않던 녀석이 날아가고 몸이 가벼워졌다. 머리가 맑아지고 의욕이 생겨서 '귀신의 집'같은 상태였던 집 청소를 했다. 


신체도 변했다. 며칠 전 정기 검사했던 병원에서는 아픈 부분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올해 들어 빠른 속도로 죽음을 향해 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막연히 울적하다 느꼈지만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몸은 홀로 견뎌내기 위해 스스로 세포를 빠르게 죽여갔다. 우울이 떠나고 그제야 몸은 죽어가는 속도를 늦췄다. 


잘 가, 내 상처투성이 우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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