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 서윤이와 6살 서준이의 갈등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아이들 등원과 하원을 맡은 엄마(할머니)의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내가 서준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가는 날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나는 결혼하지 않았고 또 자식도 없어서(?) 서준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묘한 감정을 느낀다. 유치원 입구에서 벨을 누르고 "서준이요~" 하고 말하면 "네~"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곧 유치원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쭈뼛쭈뼛 들어선다.
여기서 중요한 건 최대한 부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누구네 아빠겠지' 싶겠지만, 나는 서준이의 삼촌에 불과하므로 최대한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 아이들이 지나다닐 때면 '이 아저씨는 뭐야'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핸드폰 보는 척을 한다. 서준이가 유치원 선생님과 같이 내려올 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서준이를 더 다정하게 부르게 되는 것이었다.
서준이와 집으로 돌아올 땐 서준이의 오른손을 꼭 잡는다. 서준이는 말 그대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남자아이다. 저번엔 자기가 얼마나 달리기를 잘하는지 보여주려고 갑자기 횡단보도를 전력질주하는데, 정말 아차 하는 순간에 내 손을 벗어났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는 서준이가 딴소리로 내 집중력을 흩뜨리려 해도 손만은 꼭 잡고 있는다.
서준이네 집 앞에 도착해 벨을 누른다. 그러면 곧 서윤이가 "삼촌~" 하면서 문을 열어준다. 나는 그리 살갑지 않은 사람이어서 그렇게 다정하게 나를 부를 때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안녕"한다.
마음 같아서는 서준이를 데려다주자마자 바로 뒤돌아가고 싶지만 아이들의 '같이 놀자' 눈빛을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다. 같이 놀기에 앞서서 한 5분 동안은 아이들의 자랑을 들어줘야 한다. 서윤이는 학교에서 그린 그림이나 선물 받은 지갑과 같은 아기자기한 물건을 보여준다. 서준이도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긴 하는데, 다소 기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알파벳에 눈을 그리고 팔다리를 그리는 식이다. 나는 조카가 영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기특하면서도 상당히 난해한 그림을 보며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잘한 것 같았으므로 과장하여 잘했다고 칭찬한다. 그렇게 한 5분 정도 자랑을 들어주고 나면 둘 중에 한 명이 "삼촌, 피구 하자" 한다. 삼촌은 정말이지 집에 가고 싶다.
아이들하고 공 좀 주고받다가 밥 먹을 시간이 되면 대충 핑계를 대고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공 주고받기가 시작됐다. 그런데 이토록 단순한 놀이를 하면서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규칙이 있다. 꼭 한 번씩 주고받아야 한다. 서윤이한테 공을 두 번 주면 서준이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누나가 2번 했으니까 자기도 2번 해야 한다고 말한다. (피곤)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피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은 가끔 이상한 논리로 서윤이가 서준이보다 더 많이 공을 차지할 때가 있는데, 한 번씩 공을 주고받는다는 규칙과 함께 둘만의 서열도 규칙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공을 주고받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둘 사이에 분위기는 과열되므로 나이 먹은 삼촌은 공을 주고받는 것 외에도 그 분위기를 적절히 조정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열심히 공 주고받기 놀이, 아이들 말로는 피구를 하다 보면 아이들이 서서히 지쳐간다. 이때 엄마(할머니)가 미리 준비한 밥을 갖다 준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순간이 됐다. 나는 "밥 맛있게 먹어~ 삼촌은 간다~" 하고 여유롭게 말한다. 그러면 허겁지겁 밥을 먹던 아이들은 "한 판만 더!" 하고 가라며 막아선다. 그리곤 아차 싶었는지, "두 판, 아니 세 판!", "아니 백 판!" 하고 가라며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나는 단호히 "안 돼"를 서둘러 외치고 도망친다.
나는 그 집에서 살지 않기에 서윤이와 서준이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뿐 내가 없을 때 둘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누나로부터 '힘들어서 못 키우겠다', '내가 아무래도 잘못 키운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요즘 애들은 확실히 빠른가 싶다. 듣기로는 서윤이가 서준이를 견제하느라 바쁘다고 한다. 어른의 마음으로는 먼저 태어난 서윤이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동생을 이끌어줬으면 싶지만, 서윤이는 자기가 더 많이 안다는 것을 이용해 서준이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있음을 표시한다. 그런 식으로 서준이를 깔고 앉으려는 서윤이를 보며 누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가 보다.
이렇게 가다간 언젠가 서윤이 입에서 "엄마는 나만 미워해"라는 아주 진부한 소리가 나오게 될 것이다. 그날이 머지않았음을 느낀다. 서윤이가 서준이를 깔고 앉으려는 만큼 그게 눈에 다 보이는 부모는 그만큼 서준이를 더 챙겨주려고 할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서윤이는 또 서윤이대로 섭섭할 것이다. 그렇게 감정에 감정이 더해지다 보면 결국 서윤이는 "엄마는 나만 미워해" 하며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누나 품에 안길 것이다.
이런 걸 보면 내가 부모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른의 마음으로 볼 땐 한없이 유치한 일이지만 그 어린 마음을 생각하면 그때 겪어야 하는 당연한 성장통이기도 하다. 아무튼 10분 거리에 사는 삼촌은 그 모든 이야기들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되니, 그저 갈 때마다 열심히 피구 놀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