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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덕에 '소통'과 '관계'를 새로 배웠다.

아궁이에 떡볶이 만들며 교실 밖에서 영어를 배웠다

스마트폰이 발전하면 할수록 전화기라는 게 원래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한 것이란 것을 자주 까먹는다. 영어공부 역시 본래 토익, 토플 같은 취업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과 소통하기 위한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나는 필리핀에서 3개월 동안 영어공부를 하면서 사람 간의 '소통'과 '관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언어가 달라도 마음이 통하는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어학원에서 가족처럼 동거 동락하며 함께 공부하고 여행했던 동기들만큼, 또 잊을 수 없을 만큼 특별했던 것이 현지 필리핀 영어 선생님들과의 관계였다. 나는 한국 나이로 서른에 이 어학연수를 떠났기 때문에 수업을 함께 듣던 동기들은 물론이고 선생님 중 대부분이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그들이 나를 형처럼 오빠처럼 많이 따라준 덕에 함께 좋은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영어수업에서 '회화'라는 건 결국 영어로 나누는 '이야기'인데, 성인의 영어교육은 결국 자신이 모국어 말하기 능력과 평소 성격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내향적인 사람들의 영어 스피킹 능력은 외향적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천천히 늘 수밖에 없다. 또한 상대에게 얼마나 마음을 여느냐 역시 대화 주제의 범위와 깊이가 달라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결국 회화를 잘하기 위해서는 어려워도 상대방과 마음을 열고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다. 


나는 어릴 적 내향적인 성격이었지만 성장하며 외향적으로 바뀐 케이스라 내향적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다. 외국인 영어 선생님들 중에도 물론 내향적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의 그런 장점은 여려 성향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떤 선생님하고는 3개월 동안 교과서 진도를 겨우 4 페이지 나간 적도 있었는데 그만큼 수업시간 중 교과서 이외의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기 때문이다. 사실 책 속의 남의 이야기보다 중요한 건 '내 생각을 영어로 얼마나 잘 전달할 수 있나?'이기 때문에 그런 수업방식이 나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예를 들면 나는 수업 중 많은 시간을 이런 식으로 보냈다. 우선 월요일에는 노트북을 들고 가서 지난 주말 동안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서로 대화를 한다. "세부 시내에 가서 해산물 요리를 먹었는데 맛은 어떻고 이런 느낌이 들었다" 등 일상에서 지인들과 흔하게 있을 법한 주제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처음엔 영어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함께 사진을 보며 모르는 단어와 관련된 표현을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식이다. 처음 1교시에는 주어 동사 위주의 살 없는 문장으로 시작했지만 마지막 8교시까지 8명의 선생님과 반복해서 대화를 나누고 나면 꽤 그럴듯한 문장들로 나의 주말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내 경험과 생각을 하루 종일 반복해서 소리 내 말하니 자연스럽게 입에 붙고 머릿속에도 더 쉽게 기억된다. 반대로 금요일에는 주말 동안 또 무엇을 할지 계획과 정보를 서로 주고받는다. 이때 역시 새로운 단어와 표현을 미리 배우고 주말 동안 실제 그 일정을 소화하면서 그 표현들을 몸으로 익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친구들과 대화하듯이 자연스럽게 웃고 떠드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영어실력도 함께 늘게 된다. 


한 명의 선생님과 하루 한 시간씩 일주일에 다섯 번, 총 5시간의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주말, 선생님들과 학교 밖에서도 자주 만나게 된다. 함께 식사를 하고 도시 투어를 한다. 정말 친구처럼 술도 함께 마시고 클럽에도 간다. 나중에 한 단계 더 친해지니 선생님들이 자신의 집으로 나와 친구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필리핀 현지인의 집에 가보는 건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자신들의 전통 음식을 직접 해주기도 하고 재래시장에서 함께 들려 직접 현지 음식을 사 먹어 보기도 했다. 


오징어로 만든 필리핀 스타일 어묵(좌)과 밀가루로 수제비처럼 떡볶이 떡을 만들고 있는 젬마(우)


집에까지 초대를 받았는데 모든 음식을 얻어먹기만 할 수가 없어 가끔은 나도 한국 음식으로 실력 발휘를 하기도 했다. 고추장을 구해서 떡볶이를 만들고, 짜파게티를 끓여주기도 했다. 떡볶이 떡을 구할 수 없어 밀가루로 반죽을 해 수제비처럼 삶아 떡을 만들고 현지식 어묵을 사용했다. 모든 한국 양념을 구할 순 없었지만 고추장과 라면 스프를 적당히 섞어 넣으니 꽤 그럴듯한 맛이 났다. 


요리를 만드는 동안 동생들은 동네 아이들과 놀아주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한국인 친구들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나중에는 정말 시끌벅적한 동네잔치가 되기도 했다. 


짜파게티에 넣을 재료를 손질하는 나와 옆에서 도와주는 나의 2교시 선생님 다이엔(좌), 맛잇게 익어가는 짜파게티(우)


또 다른 선생님 집에 초대받았을 때는 매운 음식을 못 먹는 가족들을 위해서 짜파게티를 했다. 정말 짜장면처럼 돼지고기와 야채를 미리 볶아 꽤 푸짐한 요리를 만들었다. 이미 학생들과 한국 음식을 많이 접해봤을 선생님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우리와 한국 음식을 너무 반기고 좋아해 주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 또한 행복해져 아궁이 앞에서 삐질삐질 땀을 흘렸던 기억마저 이제는 좋은 추억이 되어 버렸다. 


컵라면을 끓이기 위해 모달불에 불을 붙이고 있는 선장의 아내


내가 미처 몰랐던 건 필리핀 내 가스레인지의 보급률이 매우 떨어진다는 것이다. 당시 내가 방문해 본 모든 현지인 집에는 가스레인지가 없었다. 나는 모닥불을 피고 아궁이에 떡볶이와 짜파게티를 요리했던 것이다. 보홀 여행 때,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돌고래 와칭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니 배가 너무 고팠다. 당시 현지인들의 집에 가스레인지가 없다는 것을 몰랐던 나는 배의 선장에게 뜨거운 물을 구해 우리가 미리 챙겨간 컵라면을 먹을 수 있을까 있는지 물었다. 그는 기꺼이 우리를 본인의 집으로 초대했다. 집 안에서 뜨거운 물을 기다리는데 왠지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아 밖으로 나가봤더니 선장의 아내가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컵라면 하나 먹는데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너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선장의 가족들과 함께 컵라면을 나눠먹었던 기억이 있다. 


컵라면 하나로 끈끈해져 헤어질 때쯤엔 아쉬웠던 선장의 가족들
매일 우리의 안전을 책임져 주었던 어학원의 가드들 크리스토퍼(좌) 헤이브로라(우)

선생님들 뿐 아니라 학원에 근무하는 다른 현지 직원들과도 매우 친해졌다. 필리핀은 치안이 좋지 않아 학원 기숙사와 학교 모두 어학원에서 고용한 사설 경비원이 있었는데 매일 얼굴을 마주하다 보니 그들과도 자연스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중 '헤이브로라'라는 친구는 나와 동갑인데 벌써 아이가 다섯 명이라고 했다. 깜짝 놀라 사진이 있으면 보여달라고 했는데, 아직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없다고 했다. 당시에 나는 꽤 좋은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에 "그럼 내가 너의 첫 가족사진을 찍어줄게"라고 흔쾌히 말했다. 



나중에 실제로 그의 가족을 만났을 때 그의 와이프 품에 안겨 나온 막내는 태어난 지 50일도 안된, 눈도 간신히 뜰 정도의 갓난아이였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 문방구에서 여러 가지 색깔이 나오는 볼펜과 노트를 샀다. 우리는 '졸리비'라는 필리핀 패스트푸드점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그 앞에서 첫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날 찍은 사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는데, 인생의 첫 한국인 친구였을 우리가 그 아이들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아직도 가끔 궁금하다. 



 3개월의 필리핀 생활이 끝나갈 때쯤 동기들이 한국으로 하나둘 먼저 돌아가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한 좋은 추억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헤어지는 게 너무 슬프고 힘들었다. 이 연수를 마치면 우리는 (당시 계획상) 호주로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언제 다시 만날지 몰랐다. 그래도 한국 친구들은 나중에라도 가끔은 만날 수 있겠지만, 동생 같은 필리핀 선생님들은 정말 언제 어디서 또다시 만날 수 있을지 너무 막막한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헤어짐이 더욱 가슴 아팠다.


동기 중 처음으로 한국으로 돌아가던 젬마의 졸업실 날, 선생님들과 동기들이 한 마음으로 수제(?)사진집을 만들었다.


나와 줄리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동생 두 명과 힘을 합쳐 필리핀을 떠나기 전 마지막 대형 이벤트를 한번 열기로 했다. 선생님들을 위한 깜짝 파티를 준비한 것이다. 당시 어학원에서는 연수기간이 종료될 때쯤 한국에 사갈 기념품 구매 등을 위해 평일에도 외출할 수 있는 시간을 반나절 주었다. 단 모든 수업과 자율학습이 끝나는 밤 10시까지는 기숙사로 돌아와야 했다. 평일에 어학원 밖으로 외출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필리핀을 떠나기 전 인연을 맺었던 선생님들 모두에게 제대로 된 밥 한 끼를 대접하고 싶었다. 원래 한국인은 밥으로 정을 표현하지 않는가? 


좌측부터 앤디, 레이첼, 프렌, 브라이언, 줄리, 그리고 나


그래서 자주 가던 술집 '그린 버블'을 하룻저녁 빌리기로 했다. 어학원에서 트라이시클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던 그 술집은 우리 학원 선생님 출신의 필리피노 커플이 하는 곳으로 우리는 매 주말 기숙사 통금시간이 다 될 때까지 그곳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곤 했다. 우리는 그 가게의 사장 브라이언과 프렌을 홀리데이 티쳐라고 불렀다. "내가 너희들을 포함한 필리피노 친구들에게 한국식으로 밥 한 끼 해주고 싶어"라고 말하니 흔쾌히 자신들의 가게를 빌려주었다. 브라이언은 친구에게 부탁해 빔프로젝트까지 빌려다 주었다.


 

문닫은 펍에서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던 우리들 모습. 다행히도 그린버블에는 가스레인지가 있었다.

드디어 파티 당일, 우리는 한국으로 가져갈 기념품 대신 한식 재료를 찾아 필리핀 현지 마트 이곳저곳을 헤매었다. 재료가 없어도 오래 끓여 맛을 내기 쉬운 닭볶음탕으로 메뉴를 정했다. 고추장만 구하면 현지 재료로 얼추 비슷한 맛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후 다섯 시반쯤 수업을 끝낸 선생님들이 하나둘 그린 버블로 모였다.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투잡을 뛰거나 자녀들을 돌봐야 하는 선생님들도 있었는데, 그래도 30명에 가까운 선생님들이 그린버블을 찾아왔다. 



색지를 오려 벽에 데코레이션을 하고 선생님들 가슴에 카네이션 대신 하트 모양의 종이 브로치도 달아주었다. 오랫동안 끓인 닭볶음탕은 제법 그럴듯한 맛이 낫고 솥에 지은 밥도 나쁘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린 버블에는 가스레인지가 있었다. 처음 보았을 한국 가정식 요리가 정말 게눈 감추듯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맛있게 먹어준 선생님들에게 정말 고마웠다. 그동안의 감사한 마음과 우리의 정이 잘 전달이 되었을까? 식사가 끝날 때쯤 필리핀 생활 3개월 동안 내가 찍은 그들의 사진을 슬라이드 쇼로 보여주었다. 한국으로 먼저 돌아간 동생들에게 영상편지를 부탁해서 역시 스크린 위에 띄웠다.



웃음과 함께 시작했던 사진전은 곧 울음바다로 변했다. 선생님들도 우리에게 편지를 준비해 와 낭독해 줬는데 덕분에 우리도 펑펑 울었다. 파티가 끝나고 헤어질 때는 이산가족처럼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다음 날 교실 마지막 수업에서 우린 모두 퉁퉁 부은 눈으로 재회했다. 좋은 추억을 만들다 보니 우리는 통금시간을 어겼고 한 번에 벌점 100점을 받아 마지막 어학원을 떠나는 주말 외출 금지를 당했다. 3개월 동안 지각 한번, 단어시험 불합격한 적 한번 없던 나름 성실한 학생이던 나는 그때까지 벌점이 전혀 없었는데, 그 주에는 나와 줄리, 동생들 이름이 차례로 식당 게시판 한복판에 "외출금지라"라는 단어와 함께 크게 붙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어학원의 졸업 전 외출 제도는 사라졌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함께 남아있던 두 동생들마저 하루 일찍 떠나고, 우리 역시 떠나던 마지막 날, 나는 고맙게도 선생님들의 배웅을 받았다. 너무 아쉬워서 정말 뭐 하나라도 더 주고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공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린 그린 버블에서 나는 브라이언에게 신고 있던 신발마저 벗어주고 난 뒤에야 공항으로 향했다. 나는 그들을 정말 아끼고 사랑했다. 서로 언어가 완벽하게 통하지 않았어도 서로 마음을 열고 따듯하게 대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나니 세상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필리핀에서 나는 영어가 아니라 소통과 대인관계에 대하여 다시 배웠다. 이 3개월의 경험은 지금까지 내가 외국 생활을 하면서 항상 큰 자신감이 되어주었다.

졸업식날 마지막 단체 사진. 맨 아래 왼쪽의 Mon은 호주 여행 때 재회했고, 프랭크와 모나는 2016 가족 여행차 찾은 세부 여행서 재회했다. 아직 모두 내 마음속에 있다.



이 글을 쓰고 며칠 뒤에 글 속에 등장하는 브라이언이 우리의 곁을 떠나 하늘로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브라이언은 세상에 관심이 많고 항상 긍정적이며 삶에 열정적인 친구였습니다. 


그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생일에 남긴 생일 소원을 보고 고단했던 그의 삶 안에서도 그가 얼마나 용감하고 따뜻한 사람인지 새삼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의 마지막 글과 사진을 공유해 봅니다.


브라이언이 그의 마지막 생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과 사진. 


“인생은 40부터 시작한다.” 이  말은 내가 존재했던 지난 40년을 어떻게 견뎌 왔는지 깨닫게 합니다. 어린 나이에 일찍 찾아온 의무와 책임, 스트레스 많았던 삶의 도전, 불안 발작과 우울증,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죽을병과의 길고 고통스러운 사투, 나는 항상 이 나이를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시작’이 아니라 내 인생의 ‘일몰’로 여겼습니다. 그래도 손 닿지 못할 곳으로 천진난만하고 과감하게 달려가던 좋은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습니다. 


암 선고를 받은 후 내가 어떻게 변할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의 손길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나는 영원히 감사할 것입니다. 


내 생일 소원은 나에게 친절했던 사람들이 앞으로 충만하고 건강하며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Bryan Roy Salvador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 역시 그의 말처럼 충만하고 건강하며 조화로운 삶을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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