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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워홀 대신 캐나다 이민 간다.

그렇게 9월, 우리는 한 여름밤의 꿈같았던 필리핀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결혼 준비와 호주행 준비에 매진했다. 예정대로라면 결혼식 열흘 뒤 호주행 비행기를 타야 했지만 두 가지 문제로 우리는 결국 그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첫째, 일자리 문제.

호주행을 결정하고 한국에서 하던 일의 정리와 이민 준비가 순풍에 돋 달듯이 순조롭게 일사천리로 진행이 될 수 있었던 건 호주에 가서 내가 할 일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준비 과정에서 그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몇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나에게 일을 제안했던 호주 삼촌이 우리 아버지에게는 사업에 투자를 요구했었고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순진하게도 호주 삼촌이 순수하게 나만의 능력을 보고 함께 일하길 제한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여행 며칠 동안 영어도 못하는 나의 무엇을 보고 함께 일하길 제안했을까 생각이 든다. 삼촌은 일을 도울 사람과 사업에 투자할 사람을 동시에 구하고 싶었겠지만 그 사실을 알고 나는 그분과 함께 일하기를 포기했다. 그분이 제한했던 사업은 싱크 관련 사업이었는데, 호주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도 손재주가 약간 부족했다. 예를 들어서 식탁 위에 올릴 유리 하나를 맞추더라도 그 사이즈가 정확하게 맞지 않는다던가 만듦새가 좋지 않았다. 호주 삼촌이라 부르던 분은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싱크대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당시 호주에는 한국 회사들이 진출하여 아파트를 많이 짓고 있었다. 한국에서 기술자를 데려오면 한국인의 손재주로 아파트에 딱딱 맞는 고퀄리티의 싱크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만들 수 있었고, 운 좋게 신축 아파트건이라도 하나 잡게 되면 단지 전체에 싱크를 납품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듣기에도 괜찮은 사업 같았다.


하지만 나는 싱크 사업에 대해 문외한이었으며 영어실력도 사업에 도움이 될 만큼 출중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리스크를 생각했을 때 하나의 사업에 나의 시간과 아버지의 돈을 둘 다 투자할 순 없었다. 그리고 어른들끼리 나눴던 투자 이야기도 사실 남자들끼리 술 한잔 하다 가볍게 오갈 수 있는 정도의 가벼운 이야기다고 생각되고 실제로 아버지도 애초에 투자를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사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나는 막상 호주에 가서 이런 일을 겪는 것보다 그전에 좋은 경험을 했다 생각하고 내 힘으로 호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나는 필리핀 생활을 잘 마친 뒤라 그런지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워홀 비자를 이용하면 다른 사람의 힘을 받지 않아도 호주에 가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 결혼 뒤 쓸 전세자금을 이용한다면 워홀러라 할지라도 1년 안에 괜찮은 일자리를 잡아 안정적인 생활을 할 자신이 있었다. 당시의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았을 때다. 물론 수중에 내 힘으로 전세를 얻을 돈도 없었다. 다만 6년이란 오랜 기간 연애를 했고 나이도 서른을 앞두고 있으니 양가 부모님들이 그해 우리가 결혼을 하길 바랐다. 줄리와 나 둘 다 거의 자산이 무일푼이긴 했지만 전셋집을 얻을 정도는 도와주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결혼 날짜를 잡았던 것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이미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잠잘 시간을 줄이고 생활비를 아껴서 스스로에 투자하는, 요즘 말로 영혼을 갈아 넣는 일에 익숙한, 나 역시 자랑스러운 그런 대한민국의 청년 중 하나였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하고 신체검사를 받고 호주행을 준비했다. 3개월도 안 되는 시간에 결혼과 워홀 두 가지 일을 함께 준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도전에 설레고 즐거웠다.


둘째, 비자 문제.

나는 3일 만에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발급되었지만 줄리의 비자는 이유 없이 나오지 않았다.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고 예정된 출국일자가 다가왔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거부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를 타는 날 아침까지 기다렸지만 줄리의 비자가 나오지 않아 결국 우리는 호주행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함께 워홀을 계획했던 내 여동생만 그날 예정되었던 대로 호주행 아침 비행기에 올랐다. 허탈한 마음과 함께 '호주와 나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 대신 캐나다 이민을 추천받다.

사실 티는 내지 못해도 호주행 비행기를 타지 못한 일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나는 이제 갓 결혼을 했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지만, 집도 직업도 없었다. 하던 사업까지 접었기 때문에 다시 창업을 하거나 취직을 하는 것도 막막하게 느껴졌고, 한편으론 지금 아니면 다시 외국에서 살아볼 기회도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막막한 마음에 이곳저곳 이력서를 넣어보던 그때 필리핀 어학원을 정할 때 도움을 주셨던 김민수 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사정을 들으신 원장님께서 내 얘기를 조금 더 들어보고 싶다고 밖에서 술은 한잔 사주셨는데, 내가 살아온 이야기부터 왜 외국에 가서 살아보고 싶은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그다음 날 우리 커플을 사무실로 불러 캐나다 이민을 추천해주셨다. 캐나다 퀘벡이라는 곳에는 기술이민제도가 있어 주정부에서 요구하는 학력과 나이, 언어능력이 충족되면 영주권 취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캐나다는 알았어도 퀘벡은 잘 몰랐기에 나는 그 지역에 대한 공부가 필요했다. 호주는 내가 경험해본 것들이 너무 좋아서 가고 싶은 거였지만, 캐나다는 이민을 결정 한 다음 처음 가보게 되어, 그 순서가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많은 조사와 확신이 필요했다.


아이엘츠 5.5에 도전하다.

다시 또 바빠지기 시작했다. 퀘벡 지역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한편으론 이민 조건에 필요한 아이엘츠 공부도 시작했다. 퀘벡 이민 조건에는 영어에 불어까지 필요했는데, 우선 가기를 희망한다면 영어점수를 먼저 만드는 게 시급했다. 이민이나 유학 시 각종 학교 입학에 필요한 점수가 아이엘츠 5.5 정도다. 원장님은 필리핀에 한번 더 가서 아이엘츠 공부를 하고 점수를 취득하기를 조언했다. 하지만 나의 절박함은 그 정도 여유도 주지 않았다. 당시 아이엘츠 시험이 한국에 보급되고 있던 시절이라 아이엘츠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다. 시험 응시료가 약 30만 원 선으로 비쌌지만 그래도 우선은 시험을 직접 한번 보기로 했다. 고민만 하기보다는 우선 부딪쳐보기로 한 것이다. 그래도 첫 시험에 4.5점으로 원장님 예상보다 괜찮은 성적이 나왔다. 전혀 준비가 없는 상태로 응시한 시험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한 달 정도만 준비해도 캐나다 학교 입학에 필요한 점수가 나올 것 같다고 했다. 그 길로 서점에 들러 퀘벡에 관한 책과 아이엘츠에 관한 책을 찾았다. 퀘벡에 관련한 책은 중고 서점에서 두권 정도를 찾을 수 있었고, 아이엘츠는 운 좋게도 막 출간된 줄리정 선생님의 책을 찾았다.


당시 서점에 아이엘츠 관련 섹션은 손으로 두세 뼘 정도로 그것도 그중 대부분이 수학의 정석만큼이나 정말 읽기 어려운 구성의 책들이었다. 그중 줄리정 선생님의 책은 읽기 편한 디자인의 시험 준비 개념서로 빠른 시간에 아이엘츠 시험 응시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줄리정 선생님의 온라인 강의 역시 등록했다. 강의를 반 정도 들었을 때 줄리정 선생님의 대면 강의를 듣고 싶어 근무하는 어학원에 등록하고 부천에서 강남까지 매일 왕복했다. 줄리정 선생님한테 실제 강의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한 달 뒤 나는 정확히 1점이 오른 5.5점이 나왔고 바로 캐나다행 이민 서류에 서명을 했다. 호주 가는 게 틀어진 지 한 달만의 일이었다.


필요한 영어 점수를 얻고 나니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졌다. 그다음 해인 2013년 3월 30일을 출국일로 정하고 본가에 줄리와 머물며 이민 준비를 했다. 막간을 이용하여 나는 아르바이트도 했는데, 부천 중동의 대형 영어학원에서 웹디자이너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원장님은 나의 사연은 듣고는 나와 줄리에게 무료로 영어 수업을 수강할 수 있게 배려해주셨다. 사업을 정리한 돈으로 필리핀 어학연수와 결혼식에 사용하고 6개월 이상 수입이 없던 우리에게 단비 같은 수입이 생겼다. 당시 아버지의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져 결혼하면 받기로 했던 전세금 지원도 받지 못해 이민 수속을 위한 통장 잔액 증빙 액수마저 모자랐다. 처음으로 지인에게 큰돈을 꿔보기도 했다. 어릴 적 집에 빚쟁이가 찾아오는 장면을 종종 봤기 때문에 나는 살면서 누구에게 돈을 꿔준 적은 있어도 절때 꿔본 적은 없었다. 나 자신이 몹시 구차해 보였지만 꾹 참고 차근차근 준비를 잘해서 얼른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는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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