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토큰 내고 지하철 타며 깜짝 놀랐던 기억
우여곡절 끝에 나는 호주 워킹홀리데이 계획을 취소하고 캐나다행 비행기를 탔다. 나는 학생비자를 받았고, 줄리는 관광비자를 받아 캐나다에 입국했다.당시의 캐나다 퀘벡의 기술이민 과정은 주정부에서 요구하는 영어와 프랑스어 점수를 취득하고 부족 직업군 관련 학위를 퀘벡 내에서 수료하면 영주권 취득이 가능했다. 이민 지원자의 나이, 학력, 언어능력에 등 점수를 매겨 이민 가능 여부를 결정하는 점수제 이민이었다. 우선은 영어권인 토론토에 3개월간 머물며 캐나다에 대한 적응도 하고 프랑스어 수업을 들을 예정이었다.
우리가 이용한 한국-캐나다 간의 항공편은 중국을 경유하는 80만 원짜리 최저가 티켓이었다. 출국날 아침, 국제선 출발은 당연히 인천공항이라고 생각하고 짐을 바리바리 싸서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체크인을 시도했는데, 항공사 직원의 얼굴에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어 이 항공 티켓의 출발지가 김포공항이라고 했다. 유학원에서 비행기 티켓팅을 대행해줬으나, 나는 또 그걸 꼼꼼히 확인하지 않았으니 누구의 책임이라 탓할 수도 없고,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건 스피드였다. 다행히 인천공항에서 김포공항까지는 막힘 없이 이동이 가능했고 나는 오랜만에 우리 아버지의 레이스 본능을 보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북경행 비행기를 탔다. 환승지에서 난생 처음 우연히 북한 사람들을 보았는데 고위층 인사인지 양복 상의에 배지를 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대한민국'이라고 적힌 나의 여권을 뒤집어 살짝 가렸다. 한숨 돌린 뒤 토론토행 비행기에 올랐는데, 영어를 잘 못하던 중국 항공사 직원이 우리에게 정말 이상한 자리를 주었다. 양쪽 창가에 2명 가운데 4명이 앉는, 한 열에 총 여덟 좌석이 있는 구조의 비행기였는데, 가운데 4 좌석 중 중앙 두 좌석에 우리를 배정한 것이다. 더 재밌었던 건 우리의 앞줄, 뒷줄, 그리고 우리의 양 옆의 사람들이 모두 한 일행으로 보였다. 덕분에 비행 내내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는데 특히 출입국 신고서를 작성할 때는 그들 모두가 함께 상의를 하는 바람에 너무나도 괴로웠다.
열악한 환경에도 시간은 성실하게 흘러 우리 탄 비행기는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나오는 우리 캐리어와 이민가방을 카트 위에 쌓았는데 그때 '이민'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조금 실감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3월 말, 바람은 쌀쌀하고 햇빛은 따뜻하던 캐나다 토론토의 피어슨 국제공항이었다. 문을 열고 나와 처음 마주한 토론토의 인상은 딱 니콘 수동 카메라에 코닥 필름을 넣어 찍고 현상한 사진 느낌이었다. 호주와는 분위기가 또 달랐다. 우리를 마중 나왔던 토론토 유학원 원장님의 렉서스가 공항 인터체인지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많은 생각들이 빠르게 생기고 사라졌다.
토론토에 머무는 3개월 동안 우리가 묵을 곳은 수잔이라는 흑인 여성이 운영하는 셰어하우스였다. 한 달에 $800을 내고 우린 3층 집의 마스터 베드룸을 렌트하였다. 화장실은 줄리와 나를 포함해 총 4명이 셰어를 하고, 주방은 다섯 명이 셰어를 했다. 수잔과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집 구경을 하고 간단한 규칙에 설명을 받았다. 셰어하우스에선 욕조와 싱크의 수채 구멍을 사용 후 얼마나 청결하게 청소하느냐가 항상 가장 큰 관건이다. 월요일에 있을 오리엔테이션 자료를 받고 원장님과도 인사를 했다. 대충 짐을 풀고 나니 해가져서 간단하게 햄버거로 끼니를 했다. 이렇게 나의 캐나다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집을 떠난 지 약 스물두 시간 후였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식재료도 살 겸 첫 외출을 하기로 했다. 토론토 다운타운의 크리스티 지역에 있는 코리아 타운은 우리 집에서 지하철로 열 정거장 거리였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종점이 지하철역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다. 토론토의 대중교통을 이용한 첫날 놀란 점은 세 가지다.
첫째, 토큰을 쓴다.(토론토의 대중교통 TTC는 2019년 11월 30월 토큰을 사용을 종료했다.)
둘째, 지하철 플랫폼에 스크린 도어가 없다.
셋째, 지하철에서 핸드폰이 안 터진다.
교통카드 사용에 정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토큰은 다소 충격적이었고 스크린도어가 없는 플랫폼을 지나는 지하철의 모습도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자국 자동차 회사가 없어 토론토 거리 위 대부분의 자동차가 미국, 일본, 유럽에서 온 수입차들인 것도 역시 신기했다. 캐나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선진국', 살기 좋은 나라였는데 머릿속의 그리던 선진국의 도시 풍경과는 우선 조금 달랐다. 크리스티 역에 내려 마주한 한인타운의 모습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것처럼 느껴졌다. 한국어 간판들의 폰트와 디자인이 그런 느낌을 준 것 같다. 길거리에는 트램까지 다니고 있어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느낌도 들었다.
3월임에도 날씨가 썰렁해 경량 패딩을 입어야 할 정도로 쌀쌀했지만, 강아지와 자전거 이용자들에게 친절한 토론토 사람들의 모습이 마음까지 춥게 하지는 않았다.
캐나다에서의 첫 외식 메뉴로 나는 제육덮밥을 그리고 줄리는 감자탕을 주문했다. 한국 떠나온 지 48시간도 안되었는데 벌써 한식 생각이 나는 거 보니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토종 한국인이다. 우리 앞으로 캐나다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한국과 캐나다 식당문화의 가장 큰 차이점 하나는 바로 팁 문화다. 가이드북에서 대충 보기는 했는데 혹시 실수할까 싶어 서빙을 하던 한국인 직원에게 살짝 물어봤다. "저희가 토론토에 어제 도착해서 그러는데 팁을 얼마나 줘야 하는지 몰라서요" 우리 질문을 받은 직원은 "드신 금액의 10% 정도 주시면 돼요" 하고 알려줬다. 우리가 먹은 음식이 총 $16.83이라 반올림해서 팁을 $2를 줘야겠다 생각하고 당당하게 숫자 2 버튼을 눌렀다. '이 정도면 토론토에서의 첫 외식은 성공적이었다'하며 가게를 나와 영수증을 봤는데, 자세히 보니 우리가 팁으로 지불한 금액은 2불이 아니라 2센트였다. 캐나다에선 소수점 아래 두 자리까지 표기가 되기 때문에 '2'가 아닌 '200'을 눌러야 $2가 지불되는 방식이었다. 가게 종업원들이 서울 촌놈의 실수를 너그럽게 웃어넘기길 바라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팁 외에도 토론토에서 적응해야 할게 많았다. 월요일부터 당장 불어 학교에 갔야 했다. 불어 학교는 퀘벡 이민을 위해 생긴 특별반으로 반 학생은 모두 세명이었다. 내가 학생들 중 나이가 제일 많은 것은 이제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문제는 프랑스어가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다. 생소한 발음에 안 쓰는 입안의 근육을 쓰다 보니 수업이 끝날 때쯤엔 침이 바싹바싹 마르고 입 주변이 아팠다. 나보다 어린 동생들은 수업을 잘 따라갔지만 시차 적응도 안된 나는 집중이 힘들었다.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날부터 복습을 엄청 열심히 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기억을 살려 강의 내용을 녹음해 지하철을 타고 오며 다시 들었다. '선생님의 질문에 항상 내가 제일 먼저 대답하겠어'라는 다짐으로 열심히 복습 한 덕에 결국 그다음 날 수업 진도가 16분이나 일찍 끝났다.
토론토 생활을 하면서 처음 좋았던 점 중에 하나는 내가 광고에 노출되는 시간이 매우 적다는 것이다. 캐나다로 오면서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네이버에서 구글에서 옮긴 것도 그렇고 TV도 적게 보고, 거리에도 광고가 적었다. 광고를 적게 보니까 '무언가 갖고 싶다'라는 생각이 줄어들고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인터넷 쇼핑에서 멀어진 것 역시 좋았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상점에 들릴 때 사진을 찍어놨다가 다른 상점과 가격비교를 하고 구매했다. 이런 아날로그 방식의 물품 구매가 조금 불편하긴 해도 소비자 입장에서는 충동구매를 줄일 수 있었고, 판매자 입장에서는 쿠폰 경쟁과 1~200원 가격 경쟁에 날을 세우는 소모를 줄여도 되니, 모두가 물건과 서비스의 진짜 가치만큼 지불하고 지불받는 건전한 사회처럼 느껴졌다.
불어를 배우면서 한국어, 영어, 불어 세 가지의 언어를 비교할 수 있게 되니 '영어'라는 언어에 대해서도 매력을 느꼈다. 한국에서는 서로 통성명을 하고 나면 나이를 물어보고 호칭을 정하는 게 당연한 순서인데 영어에서는 모두 이름을 부르고 'You'라고 부르기 때문에 서로 나이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타인이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I'를 제외한 모든 'You'들을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 아, 물론 그 전제에 'I'가 'I'를 사랑하는 자기애가 전제 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또한 프랑스어는 자유, 박애, 평등의 나라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데 막상 프랑스어를 배우다 보면 그들이 혁명 전에 얼마나 많은 성차별이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주어는 물론이고 동사, 형용사에도 성별이 있어 대화를 하다 보면 문장 속 주체의 성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지금이야 그런 차별이 많이 없어졌겠지만 불어 공부를 하는 사람 입장에서 그 많은 동사, 형용사들의 변형을 철자자까지 모두 외우는 게 매우 힘들었다. 문득 영어가 세계 공용어인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지 한국과 다른 캐나다의 특징 하나는 음주에는 매우 엄격하고 흡연에는 엄청 관대하다는 것이다. 술의 유통은 정부에서 독점 관리하기 때문에 정부 직영의 주류 전문 상점이나 판매 면허를 가지고 있는 곳에서만 구매가 가능했다. 이것마저 구매 가능한 시간이 정해져 있다. 술집에서도 새벽 3시 이후에는 술을 판매할 수 없어 한국처럼 24시간 술을 마실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야외에서 술을 마실 수도 없어 우리처럼 강변 공원에서 피크닉을 하며 음주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반대로 야외 공공장소에의 흡연은 가능하다. 간접흡연의 위험에 대한 인식도 많이 부족하여 축제장 한복판에서 흡연을 하기도 하고 유모차를 밀고 걸어가며 흡연하는 부모들의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합치면 술과 담배를 한 장소에서 할 수 없다. 유일하게 술과 담배를 합법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공공장소는 주류 판매 면허를 가지고 있는 축제장이다.
우리는 토론토 생활 일주일 만에 유학원 주체로 떠난 첫 여행에서 운 좋게도 좋은 인연들을 만나 매일 주말 맛집을 찾아다니며 토론토 생활에 빨리 적응해 갔다. 호주와 필리핀에서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토론토의 도시 시스템은 매우 쉬운 편이었다. 시내를 하늘에서 보면 블록형 계획도시로 길 찾기가 매우 쉽다. 한인 수가 많아 한국 상품과 관련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인프라도 많았다. 토론토 생활 3개월 만에 이미 토론토 생활에 적응이 되었는지 외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리고 약간의 지루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