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 VS 몬트리올
캐나다는 영어 어학연수로 유명한 대표적인 나라이다. 영어의 본고장 영국은 학비와 생활비가 비싸고, 미국은 총기와 마약 등 위험한 것들이 많고, 호주는 호주 특유의 오지식 발음 때문에 꺼려진다면 미국식, 영국식 영어가 적당히 잘 버무려진 글로벌 스탠더드 영어를 사용하고, 물가가 미국보다 저렴하며, 여자 혼자 또는 미성년 아이들만 보내도 안심이 될 정도로 안전한 국가 캐나다가 영어 어학연수지로는 제격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모두 열심히 영어공부를 할 때 나는 이곳에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우리 이민의 최종 정착지가 퀘벡주의 몬트리올이었고 그곳은 프랑스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곳으로 이민을 결정하기 전에 캐나다에서 불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사연이 있다. 신대륙 개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절 아메리카의 북동부, 현재 퀘벡 지역을 먼저 발견하고 개척한 것은 프랑스인들이었다.(물론 그전에 원주민이 있었지만 역사는 항상 승자의 역사만을 기록하기에..) 하지만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 정부는 퀘벡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남겨두고 철수하였고, 현재 그들은 자연스럽게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되었다. 스스로를 퀘벡콰(Québécois)라고 부르는 퀘벡 사람들은 영국계 캐네디언들로부터 임금과 언어 등으로 많은 차별을 받아 두 차례나 캐나다로부터 독립하려 국민 투표까지 진행했지만 매번 간발의 차이로 패하여 독립하지 못했다. 이 독립 찬반 투표 전 퀘벡의 몬트리올은 캐나다 최대의 도시였으나 불안을 느낀 자본가들이 토론토로 대거 이탈하면서 경제규모가 줄었고 현재는 캐나다 제2의 도시가 되었다. 이후 캐나다 연방 정부는 공식적으로 퀘벡의 불어 사용을 인정하고 토론토와 몬트리올 사이 오타와에 수도를 정하는 등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영국계 캐나다인들이 서로 어우러지도록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지금도 의사와 간호사, 경찰과 소방관 등의 관공서에서 근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구사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퀘벡 이민을 위해서는 영어 공인 점수는 물론 불어 점수 역시 필요했기 때문에 나와 줄리는 토론토에 3개월 간 머물며 프랑스어를 배웠다. 이 기간은 우리가 캐나다와 불어에 적응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토론토 생활도 경험해 봄으로서 나중에 몬트리올과 비교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 프랑스어 연수가 끝나는 6월 말 몬트리올로 이주할 예정이었다.
미국, 호주, 캐나다 등 대표적인 이민국가들이 대대적으로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부족 직업군을 채우고 세금을 걷어들일 사람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이민정책으로 받은 새로운 이민자들은 튼튼한 국가 재정에 주춧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호주의 이민이 갈수록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이유는 세금을 걷어들일 국민의 수가 이미 충분하다는 얘기로 앞으로는 자국에 더 도움이 될 사람들의 이민만 받겠다는 뜻이다. 내가 이민을 결정할 시기, 캐나다의 퀘벡만이 캐나다 연방 정부와 다른 별도의 이민제도를 가지고 있어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자력으로 영주권 취득 가능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호주 이민이 틀어진 뒤에 우리는 지금이 아니면 해외에 살아볼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마지막 기회를 잡고자 퀘벡을 선택한 것이다.
토론토 생활이 두 달이 되어 갈 때쯤, 한국보다 봄이 늦은 캐나다는 5월 중순 빅토리아 데이(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의 생일, 프랑스 문화권인 퀘벡은 같은 날을 National Patriots Day로 지정) 연휴를 시작으로 관광철이 시작된다. 나와 줄리와 역시 연휴를 맞아 콧바람도 쇠고 우리가 살 곳의 분위기도 미리 한번 둘러보려 유학원에서 준비한 2박 3일 퀘벡 여행에 참가하기로 했다.
2박 3일의 여행의 첫 경유지는 오타와였다. 토론토에서 차를 타면 동쪽으로 약 4시간 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호주의 수도는 시드니로 알고 있고, 캐나다의 수도를 토론토와 밴쿠버 중 하나쯤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호주의 수도는 캔버라이고 캐나다의 수도는 오타와이다. 우리의 수도 서울의 경우 애초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는 물론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되었지만 오타와나 캔버라는 우리의 세종시처럼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행정수도로 인구 대부분이 공무원, 정치인 등 정부기관에 소속된 사람들이다 보니 관광을 위해 찾는 일반인들이 적고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타와는 리도운하를 주변으로 멋진 국회 의사당 건물과 캐나다 총독 관저, 국립 미술관 등이 있어 작지만 한 번쯤 둘러볼 만한 도시다. 특별한 맛집은 없지만 도시내 재래시장 주변에 아기자기한 상점과 레스토랑들이 있다. 리도 운하에서 오타와 강으로 이동하기 위해 수문을 지나는 요트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이색적인 풍경이다.
반나절의 짧은 오타와 관광을 마치고 동쪽으로 2시간 더 이동하니 몬트리올을 만날 수 있었다. 퀘벡주를 알리는 표지판을 지나면 모든 이정표가 영어에서 불어로 바뀌어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정표에 한국어와 영어가 함께 표기된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지만 퀘벡은 철저하게 불어 장려 정책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이정표와 간판에 영어 표기가 제한된다.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퀘벡에도 분명 딜레마가 있으니 매년 주요 세계 대학 순위 상위권에 랭크되는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교가 영어학교라는 것이다. 매년 배출되는 우수한 졸업생들은 불어 장려 정책으로 퀘벡 내에서 직장을 구하고 정착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한편으론 몬트리올은 배와 기차로 유럽과 캐나다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ICAO 등의 국제기구와 세계 각국의 영사관 등이 제일 많이 위치한 도시 중 하나이며, 최근에는 인공지능(AI) 연구의 메카로 떠오르며 많은 기업들이 이곳에 연구소와 공장을 세우고 있어 필연적으로 영어와 불어가 공존하는 모자이크 컬처를 형성하고 있다.
몬트리올의 첫인상은 '매우 활기차다."였다. 사실 토론토라는 도시가 살기는 매우 편하지만 조금 지루하다고 느끼던 때에 몬트리올에서는 무언가 날것의 에너지를 느끼며 '살아있다'라고 느껴졌다.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친구들의 연주가 매우 흥이 났고, 그 분위기를 즐기려는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이 거리 위에 한대 엉켜 정말 신선한 에너지를 만들어 냈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을 누군가는 겁낼 수도 있지만 한번 맛보고 나면 자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자유'를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몬트리올의 첫인상에 우리는 '합격'을 주었다.
마지막 여행지는 퀘벡이었다. 조금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퀘벡주 안에 퀘벡시티가 있고, 그 안에 또 구시가지인 올드 퀘벡이 있다. 우리나라식으로 설명하면 경기도 안에 경기시가 있고 그 안에 오래된 구도시와 신도시가 있는 것이다. 이 퀘벡시티는 퀘벡주의 '주도'로 드라마 도깨비로 우리에게 친숙해진 '단풍국'이다. 퀘벡의 주도기 때문에 퀘벡 주의회 건물과 각종 정부청사들이 위치해 있고 바로 옆에 성벽 안에 퀘벡의 옛 구시가지가 그대로 보존된 올드 퀘벡이 있다.
아직도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는 동네이지만 성벽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마치 테마파크에 입장하는 기분이 든다. 성벽을 통과하는 순간 마치 과거로 시간이동을 한 것처럼 고즈넉한 옛 프랑스 양식의 건물과 간판, 그리고 마차를 볼 수 있다. 그 위를 함께 달리는 최신식의 자동차와 사람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풍경이 상당히 재미있다. 올드 퀘벡은 풍경이 아름다워 그냥 걷기만 해도 너무 좋은 곳이다. 특히 여름과 가을에 너무 예쁘고 겨울에 방문한다면 제대로 된 설국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퀘벡의 겨울 풍경은 아래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콘셉트로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짧은 패키지여행이었지만 가이드 투어를 통해 퀘벡의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토론토 생활을 마치고 나면 퀘벡에서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토론토로 돌아간 나는 다시 프랑스어 공부에 열중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프랑스어 공부는 정말 쉽지 않다. 동사 변형이 많은데 그 안에서 불규칙 변형도 많아 외울게 너무 많고, 연음이 많기 때문에 듣고 쓰기가 너무 어렵다. 상대적으로 영어가 정말 너무 친숙하고 재미있게 느껴질 정도다. 결국 난 이민의 조건에 필요한 불어 공인 점수 A2를 3개월 만에 만들지 못한 채로 토론토 생활을 마무리했다. 밤 버스를 타고 퀘벡으로 떠나는 마지막 밤 3개월 동안 정든 토론토 동생들과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