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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바뀌는 이민법, 타이밍이 중요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나의 이민 일기

누군가에게 처음 호감을 느끼고 썸을 타다가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기까지의 이 연애 초반 기간은 누구에게나 가장 설레는 잊을 수 없는 시간이다. 도시와의 관계 역시 그렇다. 토론토 생활에 살짝 지루해져 갈 때쯤 몬트리올로 이동을 했더니 매일매일 새로운 생활에 다시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재미'는 안정과 거리 멀다. 자신을 모험 속에 밀어 넣음으로써 삶의 재미와 의미를 느끼는 사람은 절대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다. 어른들은 그런 사람을 보고 역마살이 끼었다고 말한다.


몬트리올은 여름은 세달 가까히 매주 새로운 축제가 열려서 지루할 틈이 없다.


우리가 몬트리올에 도착했을 때는 때마침 축제 시즌으로 몬트리올의 최대 축제인 재즈 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열정으로 가득한 여름의 몬트리올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몬트리올의 긴긴 겨울을 견딘 다음 맞이한 여름이라면 더욱 그렇다. 축제는 거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겨울 동안 충전해 두었던 흥을 마음껏 폭발시킨다. 자연스럽게 도시는 활기를 띠고 상권도 살아나기 마련이다. '축제'가 더 좋은 이유는 부자와 빈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무료 공연이기 때문에 거리를 거닐 수 있는 에너지와 맥주 한잔 사 먹을 수 있는 돈만 있다면 누구나 충분히 축제를 즐길 수 있다.  


몬트리올 축제에서 맥주 파는 기술, 손 안 대고 맥주를 따르는 바텐더와 2미터가 넘는 장신의 아르바이트생


토론토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몬트리올에서도 첫 주말을 보내고 바로 직업학교에 등교를 시작했다. 나는 10개월짜리 Food and Beverage Service를 전공으로 선택했고, 이 과정을 수료하면 워크퍼밋을 받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워크퍼밋이 만료되기 전에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이민 준비 시작 후 만난 첫 번째 난관

하지만 첫 번째 난관이 우리에게 봉착했다. 직업학교 시작 2주 만에 이민법이 바뀐 것이다. 퀘벡 이민에 필요한 프랑스어 점수 기준이 A2에서 B2로 상향되었다. 당시 퀘벡 이민에 필요한 프랑스어 시험은 TEFAQ으로 A1, A2, B1, B2, C1, C2 이렇게 총 여섯 개의 레벨로 A2가 100점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약 40점 정도의 수준이라면 변경 후에는 70~80점 정도의 B2로 기준이 올라간 것이다. 프랑스어 능력이 좋을수록 퀘벡 생활에 적응이 빠르고 이탈도 적다고 퀘벡 주정부에서 판단했던 것이다. 당시 불어 시험에서 B2의 레벨은 4년제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정도의 불어 실력이라고 관계자들이 이야기했고 실제로 주변에 그 점수를 받은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막막하고 극단적인 변화였다.  


게이 페스티벌 퍼레이드를 끝으로 몬트리올의 여름은 끝이 난다.


 이민법이 계속해서 바뀌는 가장 큰 이유는 첫째, 이민자의 수를 조절하기 위함이고, 둘째로 현지에 필요한 직업군을 우선으로 충당하고자 함이고, 마지막으론 이민 후 적응이 빠르고 오래 머물 이민자를 선별하기 위해서이다. 오랫동안 이민을 준비한 사람 입장에서는 억울하기도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꾸 바뀌는 이민 정책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기존에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들 중에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이 충족되면 다른 주로 이동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민법이 빠르게 바뀌는 환경 속에서 불안하다면 영주권을 최대한 빨리 따는 수밖에 없었다. 



칵테일과 와인 수업은 취미로 배워도 즐거운 수업인데, 당시에는 바쁜 스케줄에 지하철에서 짬 내 레시피를 꾸역꾸역 외웠다. 


이민법 변경이 발표되고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여름방학이었는데 개학 후 학교로 돌아오지 않는 학생도 있었다. 빠른 포기를 한 것이다. 토론토에서 퀘벡 이민을 함께 준비하며 불어공부를 하던 동생도 이때 퀘벡 이주를 포기했다. 나는 사업을 정리한 뒤, 호주 워홀까지 포기하고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대책 마련 중이라는 유학원을 계속 재촉한 끝에 현지 어학원과 협력하여 프랑스어 B2 보장반 수업이 개설되었다. 우리는 당시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던 현금 전재산을 탈탈 털어 첫 번째로 그 수업에 등록했다. 계약 내용과 달라진 상황이기 때문에 학원비를 나, 한국 유학원, 현지 유학원 이렇게 3 분할하여 지불하기로 했다.(결과적으로 현지 이민 회사 '한마음'은 재정상 어렵다며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몬트리올은 자동차에 앞 번호판이 없고 지하철은 타이어를 낀 바퀴로 굴러가서 신기했다.


8월 중순부터 나는 16주간의 B2 보장반 수업을 시작했다. 오전에는 불어 풀타임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이민을 위한 직업학교 수업을 풀타임으로 들었다. 방과 후 학원을 가는 게 아니라 아예 학교를 두 개 다 다니는 꼴이다 보니 그 일정이 수능을 준비할 때 보다 더 힘들었다. 아침에 집에서 줄리와 한국말로 대화하다 불어 학교에 등교하면 바로 불어를 써야 했다. 3시에 불어 학교 수업이 끝나면 30분 뒤에 직업학교 수업이 시작되는데 바로 영어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불어 학교에서 직업학교로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타이트한 시간이라 에너지 소비가 심했다. 4개월이 정말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나중에 과정이 끝난 뒤 직업학교 선생님이 그때를 회상하며 내가 정말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정말 내 머릿속에 버튼이라도 있는 것처럼 언어 모드를 하루에 세 가지로 바꿔야 하니 정말 힘들었던 기간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보장반 수업 16주 만에 스피킹에서 B2, 리스닝 B1을 취득, 가장 빠른 기간 내에 그 위기를 모면했다. 지금 생각해도 고생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결과가 좋아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뒤로는 직업학교 졸업까지 조금 마음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혹시 불어 시험 준비를 하는 분들을 위해 그 당시 블로그에 써둔 불어공부 과정을 공유해본다.

https://blog.naver.com/miss1jihye/80205582216


하지만 이민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이민법은 계속 바뀌었고, 이 정도로 크게 바뀐 것만 총 2번이었다. 직업학교도 모두 끝나고 '이젠 정말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부족 직업군의 구성이 대폭 바뀌면서 내가 수료한 전공의 점수가 반토막 나게 된 것이다. 이민 서류를 접수할 적에 점수가 충족된 경우 인터뷰가 없이 이민승인을 받을 수 있지만, 점수가 부족한 경우에는 인터뷰를 봐야 했다. 이민관과 실제 얼굴을 마주하고 보는 인터뷰는 아무래도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라도 피하고 싶었다. 특히 줄리의 경우는 불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더 그래야만 했다. 나는 다시 리스닝에서도 B2를 취득하려고 도전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불어 듣기 능력을 향상하는 데는 그만큼 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민은 타이밍과 집중력이 중요하다. 언제 법이 바뀔지 모르니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단기간에 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함께 이민을 준비한 사람들 중에 불어 학원비를 조금 아껴보겠다고 불어를 독학과 랭귀지 익스체인지만으로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의 경우 갑작스레 B2 불어 보장반을 듣느라 추가 지출한 돈이 한국돈으로 약 400만 원 정도였지만 덕분에 2년 이상 일찍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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