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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긴 혼잣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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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ty noodle Nov 08. 2020

하루의 마음

그곳에선 부디 평안하길 바라요

갑작스러운 부고를 전해 들었다. 몇 번이나 기사를 확인했지만 믿기지 않았다. 정신이 멍해졌다. 충격에 빠진 채 두어 시간을 보낸 뒤엔, 얼마 전에 읽었던 시 한 편이 불현듯 기억났다.


“슬퍼서 전화했다. 가장 슬픈 일은 장소가 없어지는 일이다. 그러면 어디에 가도 그곳을 찾을 수 없다. 너는 어디 가지 말아라. 어디 가지 말고 종로 청진옥으로 와라. 지금 와라.”*



그로부터 몇 시간 후에는 시인의 마음을 잘 알만한 친구에게 메세지가 왔다. 


친구는 뜻밖의 소식에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우리는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살자고 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많이 투정 부리면서 살자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서로 곁에 있어줄 수 있음에 감사하자고 했다. 젊은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오래된 친구를 떠올리고 서로의 안녕을 기도하는 친구의 마음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우리는 선하고 유쾌해 보였던 사람의 비보에 허망해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는 이전에 고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땐 그녀가 무척 단단한 사람처럼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상처를 품고 있으면서도 도와달라 하지 못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나는 많은 것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는 단단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답했다. 다른 이들에게 행복을 전도하며 밝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투병 생활에 지쳐 남편과 동반 자살을 했던 고 최윤희 씨를 떠올렸다. 


서로에게 할 수 있는 다짐과 맹세들로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가 힘들 땐 괜찮은 척, 강한 척하지 말고 여린 곳을 내어 보여주자, 약하고 찌질한 모습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자, 힘들 땐 꼭 큰소리로 말하자, 서로 잘 들어주자, 혹시라도 나약한 소리를 하면 정신 차리라고 흠씬 꼬집어주면서도 잡은 손만큼은 결코 놓지 말자. 


친구는 오늘 달이 함박이라고 말하며 아프지 말고 잘 살기를 기도하자고 했다. 나도 오늘만큼은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한 번씩 기도하고 자겠다고 대답했다. 무거운 마음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마음 한 구석은 든든해졌다, 염치도 없이.  



아침이 되자 지난밤 보다 슬픔이 또렷해졌다. 


어제의 마음을 이어가기로 했다. 오늘 하루만큼은 미워하는 마음을 거두고 그 자리에 연민을 채우기로. 하루하루를 불안한 마음으로, 위태롭더라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나와 같은 사람들 또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기로. 행복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방대해 잡히지 않는다면, 행복 대신 그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도하기로. 건강과 안녕이라는 말 역시 모호하게 들린다면, 그들이 한 번이라도 더 웃음 지을 수 있는 하루를 보내길 희망하기로. 언제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로. 


내 삶에 속했던 사람들의 얼굴도 한 번씩 떠올려보기로 한다. 가까운 사람들부터 더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까지. 오래도록 연락을 하지 않았더라도 늘 마음속에 품고 지냈기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아쉬운 사람이 있다면, 시간을 내어 "요즘 어떻게 지내?" "괜찮아?" 하고 연락해 봐야겠다. 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힘든 기색이 보인다면 마음을 내어주며 찬찬히 이야기를 들어줘야지. 언젠가 만나게 되는 날엔 조금 부끄럽더라도 손을 잡아줘야지, 한번 꼭 끌어안아줘야지. 



생각을 마치고 낙엽이 수북한 동산을 걸어 내려오는데 공기가 너무 차가웠다. 눈물이 핑 돌았다.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나는 길이 너무 춥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박준, <새벽에 걸려온 전화 - 이문재 시인>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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