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좀 하겠습니다
뭘 하든 늦되는 편이다. 유행을 알아차리거나 따르는 일에도 그렇지만 생애주기에 따른 과업들을 해내는 데에는 유독 더 그런 것 같다. 유행이야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니 상관없지만, 살면서 거쳐가는 통과 의례 같은 것은 제때에 알고 잘 해내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출발이 늦어도 한참 늦은 기분이다. 남들이 10대, 20대 초반에 경험하고 졸업하는 것들을 나는 20대 후반,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겪는다. 뒤늦게 알고 헤매고는 대단한 것을 발견한 듯 감탄하거나 '나는 왜 이걸 이제야...' 하며 자책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래서 쓴다. 기왕 늦게 발견한 것, 잊어 먹지 않으려고.
사실 어릴 때에도 일기는 사부작사부작 남겼다. 하지만 그것들은 글이 아니라 똥이나 마찬가지였다. 밑도 끝도 없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싸질러 놓은 것이 대다수였으니까.
나이를 먹어서 그것들을 다시 읽었을 때 글 속의 아이가 안타까우면서도 의아했다. '아니 대체 얘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화가 났던 거야?'라거나 '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우울했던 거야?'라고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글 속에 사건의 정황이라던지 감정의 근거가 거의 없어서 나이를 먹은 내가 보고 '음, 이건 억울할 만하네'라거나 '그래도 이건 내가 잘못했네'라고 자기 객관화를 하기도 어려웠다.
교훈이 없다면 읽는 재미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등장인물만 다를 뿐 내용이 비슷한 몇 년간의 기록은 굳이 다시 찾아보고 싶지 않게 피로감만 잔뜩 묻어났다.
누군가는 일기를 쓰면서 삶을 배우고 인격적으로 성장도 한다는데, 나는 몇 년 넘도록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같은 실수만 반복했다. 해마다 낭비한 종이가 아깝다. 나무야 미안해.
하지만 그때 그렇게 종이 낭비라도 한 전적이 있으니 이제는 이런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글? 뒤늦게 내가 경험하고 알게 된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그때의 마음이 어땠는지, 쪽팔린 줄도 모르고 할 수 있는 한 자세하게 줄줄 적은 글. 나이를 먹은 내가 사는 일에 급급해져 기껏 뒤늦게 알게 된 귀한 것들을 홀랑 잊어 먹으면 언제든 다시 읽고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그 지점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만드는 글.
운이 좋다면 나만큼이나 늦된 사람이 우연히 나의 글을 만나서 '아, 이 사람만큼 늦으면 마음고생 깨나하겠구나! 나는 그전에 정신 차려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삶에서 불필요하게 낭비될 뻔한 시간을 절약해주는 엄청난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글 하나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아십니까? 일단 저는 아직 모릅니다, 히히. 만약 나중에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제가 그때의 경험과 기분을 글로 남길 수 있도록 먼 미래의 당신은 저에게 따뜻한 리플라이 하나 꼭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호호.
뭐 이렇게 써놓고 나니 나쁘지 않은 것도 같다. 글을 쓰는 이유도, 남들보다 늦된 삶을 살아버리게 된 일도.
아무튼 늦된 게으름뱅이는 더 이상 새로운 일도 없고 뒷북치는 쪽팔린 일이 없어질 때까지, 느슨하게나마 쓰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나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쓰고 있지 않을까, 쭈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