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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ty noodle Sep 26. 2024

죽은 사람은 아니에요

단지 잊혀진 사람일 뿐


"그럼 이제부터 나도 너에게는 죽은 사람인 거야?"


만약 이 말이 영화 속에 나오는 대사라면, 우리는 어렴풋이 다음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질문을 듣는 순간 흔들리는 주인공의 눈빛. 아련한 표정을 숨기느라 상대방의 눈빛을 피하면서 애써 비정하게 "그래."라고 대답한 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대방을 향해 빵야빵야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오열하는 주인공.


영화의 씬 하나가 뚝딱 만들어질 법한, 상당히 극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이 질문의 정체가 뭐냐고? 그건 바로 내가 두 달 전 이별하던 날 상대방이 나에게 물어본 유일한 질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궁금한 게 있느냐는 내 질문에 대한 그의 답.


느닷없이 왠 죽은 사람이냐고? 그러게, 나 역시 전혀 예측하지 못한 질문이다.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척 인상 깊다. 누가 나에게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주저 않고 이 질문을 꼽겠다. 내용 점수 백 점, 맥락 점수 백 점.


나는 내심 그 애가 우리의 이별을, 아니 정확히는 이별을 결심한 나의 의중을 물어볼 줄 알았다. 미안함을 곁들여 상세하게 대답할 준비도 되어있었다. 하지만 끝내 그 애는 그것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내가 그였다면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도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았을 것 같은데 그는 사귈 때와 마찬가지로 헤어질 때에도 나에게 궁금한 것이 별로 없었다. 우리가 이별한 이후에 자신의 존재가 나에게 어떻게 기억되는지가, 이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이별에 도달해 버린 나의 마음보다 더 궁금했나 보다. 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내 사람은 그러면 안 되지.


아무튼, 이별을 하는 마당에 왜 죽은 사람이니 어쩌니 하는 질문을 했느냐는 궁금증에 답답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서둘러 보충 설명을 남겨본다. 우리가 사귀기 전 그 애는 내가 쓴 글들을 읽은 적이 있다. 그중 하나가 애인이었던 사람들이 이별 후에는 내 마음속에서 죽은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당시에 감상을 전해주지 않아 몰랐지만, 그 애에게는 그 글이 무척 인상 깊었나 보다.


혹시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도 궁금하려나? 나는 그 애의 마지막 질문에 무척 당황해서 "아니, 너는 내 마음속에서 죽은 사람으로 기억되진 않을 거야. 서로의 생활권이 달라서 마주치는 일은 없겠지만,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라며 어찌어찌 대답을 했다.


그 애가 내 답변에 만족했는지, 납득을 했는지도 끝내 알 수 없었다. 그의 질문에 비하면 내 답변은 참신하지 못하고 진부하기 그지없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별하는 순간 누가 누가 더 인상 깊은 질문하기 시합을 한 것도 아닌데.


그나저나 그는 내가 "응, 너 나랑 헤어졌으니까 그동안의 내 경험에 의하면 넌 이제 죽은 사람. 자,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대답할 거라 생각했던 걸까? 그 애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서 물어봤던 걸까? 이 또한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는 모든 것을 질문할 필요는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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