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쟁이가 본 <8월의 크리스마스>

by party noodle

유독 여러 번 보게 되는 영화가 있다. 며칠 전에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다시 봤다. 이 영화를 너덧 번은 본 것 같다. 작년 이맘때에도 한창 자주 가던 책방에서 이 영화를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눴고, 올해도 자주 가는 모임에서 이 영화를 주제로 포틀럭 파티를 하게 되어 1년 만에 다시 찾아봤다.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일의 좋은 점은 볼 때마다 새로운 관점으로 영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 볼 때는 대체로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전체적인 줄거리를 파악하는 식으로 감상한다면, 두 번째부터는 다른 인물의 시선으로 사건이나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은 없다. 하지만 작년에는 어땠는지 확실히 기억난다. 그때 나는 정원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어떨지를 생각하며 봤다. 특히 종종 정원의 동생 시선에서 영화 속 상황을 바라보곤 했다. 나에게도 오빠가 있고, 그 무렵에 외삼촌이 간암으로 투병 중이셔서 엄마와 자주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함께 자란 남자 형제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대하는 시선에 이입이 많이 되었다.


그때는 죽음 앞에서 태연한 척하려는 정원도, 그에게 장단 맞춰 슬픈 기색을 숨기다가도 착잡한 마음이 새어 나오는 정원 주변 사람들도, 좋아하게 된 사람을 끊임없이 영문도 모른 채 하염없이 기다렸을 다림도 모두 안타까웠다. 영화가 끝날 무렵엔 마음이 먹먹했다. 휴지로 눈물을 훔쳤던 것도 같다.



그러나 올해 다시 보았을 땐 그리 슬프지 않았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 공감과 연민보다는 짜증과 불편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과 상황이 너무 많았다.


속 없이 모두에게 친절하게 굴고 나이에 맞지 않게 순수해 보이는 정원이가 싫었다. 당돌하면서도 제 감정을 미숙하게 표현하는 다림이는 미웠다. 심지어 스쳐 지나가는 역할인, 밤중에 사진관에 찾아와 낮에 찍었던 영정 사진을 (공짜로) 다시 찍어달라는 할머니에게도 짜증이 났다.


정원이 자기보다 훨씬 어린 다림을 이성으로 바라보는 설정이 불쾌했다. 곧 죽게 될 사실을 알면서도 좋아하는 마음을 멈추지 않은 상황에 열받았다. 정원이 곧 죽는다는 것도 모르고 속절없이 그를 좋아하게 된 다림이 경험하는 수많은 감정이 괴로웠다. 영화가 끝나며 정원의 나레이션이 흘러나올 땐 눈물을 흘리는 대신 ‘이기적인 새끼’ 혼잣말처럼 욕을 했다.



찜찜한 마음으로 넷플릭스를 껐다. 낯선 사람들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 감상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일상생활 어려운 프로 불편러처럼 보일 것 같았다. 오늘은 많이 듣고 와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모임에서 한 사람씩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짧은 감상을 전했을 때,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 영화를 처음 본 사람들, 따듯하고 안타까운 시선으로 주인공들의 마음을 헤아려가며 영화를 본 이 사람들 앞에서는 더더욱 말을 아껴야겠다고.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느냐고 질문하자, 다짐과는 달리 초장부터 낭만 브레이커가 되어 영화 속 인물과 상황이 얼마나 나를 짜증 나게 했는지 목청 높여 이야기했다. 알코올은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취한 사람처럼 조잘조잘, 때때로 테이블을 땅땅 치기도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일지 걱정되기보다는 후련하고 자유로웠다.


나의 그런 시각을 신선하게 여기는 반응도 있었고, 정원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려는 참가자도 있었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시선을 이야기해 주어 나의 관점을 확장시켜 주신 분도 계셨다. 의외였던 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도 할머니가 짜증 났다'고 공감해 주신 일이었다. 죄책감을 덜었다. 비뚫어진 마음도 수용받아서 그런지 대화는 즐겁고 풍성하게 마무리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궁금해졌다. 내년 이맘때에도 나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려나? 보게 된다면 그때는 누구의 시선에서 이 영화를 바라보게 될까. 누구의 마음이 가장 나의 마음처럼 느껴질까.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눈물을 흘릴까, 한숨처럼 욕을 할까, 아님 이전엔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경험할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