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의 얼굴이 전생에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래요. 적어도 2~3년 전쯤에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었다. 아마 99%의 확률로 SNS에서, 역시나 99%의 확률로 인스타에서였을 것이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런가? 전생의 나는 꽤나 밋밋한 얼굴의 사람을 좋아했군, 정도의 생각을 할 뿐. 아니 어쩌면 그 시대에는 이 얼굴이 밋밋하고 평범한 얼굴로 여겨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남자들이 흠모하는 그런 외모였을지도 몰라.
아무튼 그때는 그렇게나 가볍게 스쳐 지나갔던 생각을 올해는 유독 자주 붙잡았다. 그 논리대로라면 나의 전생을 현생과 비추어서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마 현생의 내가 조금 고달파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전생의 누들씨! 와 같은 생각을 종종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전생의 나는 아마 남자였을 거라는 상상에서 시작한다. 지금의 내 얼굴이 전생에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라는 시작점은 까맣게 잊고, 단지 지금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니까 그때는 남자였겠지, 라며 단순히 반전시켰을 뿐이다.
지금은 동양에서, 한국에서 태어났으니까 왠지 전생에는 서구권에서 태어났을 것 같다. 캐나다를 그리워하는 나를 생각하면 북미쪽일 수도 있을 것 같고, 스페인의 여름을 사랑했던 나를 떠올리면 유럽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면 아무런 감정도 지식도 없는 아프리카 대륙 어딘가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같은 동양권이지만 일본이나 중국, 또는 동남아 같은 곳이려나?
어느 국적의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한창 젊은이일 때, 그의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그는 전쟁에 참전했을 것이다. 병사 1 정도의 존재감이 아닌, 무리들을 이끌고 의사 결정을 하는 그런 중대한 역할의 사람으로. 당시 그의 나이가 그렇게 많지도 않았을 것 같다. 한 삼십 남짓?
그는 꽤 잘 나가는 남자였을지도 모른다. 어린 나이부터 지식과 능력을 인정받고 당연한 듯 요직을 꿰찬. 키는 다소 작고 체구는 말랐지만, 이목구비가 또렷또렷하고 진하고 전체적으로 딱 봐도 단단한 인상을 주는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른들은 그가 한 자리하자마자 너도나도 혼사길을 터주겠다고 했으며, 귀한 집 처녀들로부터 존경과 애정 어린 눈길도 익숙하게 받았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 따위, 그의 안중에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테다. 그에게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것이었을 테니까. 그가 그인 채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에게 제발 자신의 마음을 받아 달라며 그에게 애정을 구걸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 이른 나이에 좋은 집안의 귀한 딸 하나와 결혼을 했다. 그의 집 또한 유복했고, 양가는 여러모로 서로의 조건에 만족했으므로 결혼의 반대와 같은 거추장스러운 과정 따위는 없었다.
무엇이든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관직에 앉고, 결혼을 하고, 자식이 생기는 그 일련의 과정들 속에 비극이나 결핍이나 고민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인생이 너무나도 쉽게 느껴졌겠지. 그에게 삶이란 몇 번이나 반복되어도 반갑고 기껍고 자신 만만한 것이었겠지. “이것이 삶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외칠 수 있을 만큼.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공평하다고 해야 할까, 가혹하다고 해야 할까. 그의 즐거운 삶은 서른을 마지막으로 끝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군사들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갔던 그 해에. 전쟁이 시작되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을 무렵.
모든 것에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던 그는 자신의 결정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으로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전쟁에서 그가 무리를 대표해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했는데, 그때도 그는 별로 고민이 없었다. 그가 늘 살아왔던 대로 확신에 가득 차서 ‘이럴 것 같으니 이렇게 하자’라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 그의 의견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결정이라고, 그렇게 했다간 우리 모두가 위험해진다고. 평생 겪어본 적 없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그는 분노했다. 훼손된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 큰소리를 떵떵 쳤다. 자신을 믿으라며, 내가 다 안다며.
다행히 그의 전략은 아슬아슬하게 성공하였고, 아주 소수의 부하들 만을 희생시켰다. 그들의 희생은 그에게 그리고 그의 조국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그들의 희생을 크게 애도하지도 않았다, 그는. 사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한 일, 그래서 잠시 손상을 입은 자신감을 다시 되찾은 일이 훨씬 더 중요했다.
전쟁의 광기 속에서 자신의 명예가 더 높아지자 그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며칠이 지난 뒤 다시 한번 커다란 전략을 짜고 지휘를 할 때에도 그는 겁날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손바닥처럼 빤히 보이는 듯했다.
기고만장한 그는 너무나도 손쉽게 전략 하나를 내놓았고, 이번에는 그것이 다소 무리한 전략이라며 지난번보다 더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그에게 다른 사람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보고 들리는 것은 그가 지난번의 내놓은 전략으로 인해 드높아진 명성과 그로 인해 더욱 강해진 자신의 확신뿐이었다.
그는 수많은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진군했다. 그를 따르는 군사의 절반은 그의 결정을 의심했고, 나머지 절반은 마치 그의 마음속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인 것처럼 그의 결정을 맹신했다. 한 명의 추종자만 있어도 든든할 그 상황에서, 절반이나 그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결정을 도무지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 없었다.
확신에 찬 그는 부대를 이끌고 어느 산맥의 계곡에 진입했다. 아무런 의심 없이 힘차게 발을 뻗던 그 순간, 그와 그의 부대는 잠입해 있던 적군과 그들이 설치해 놓은 함정으로 인해 순식간에 몰살당했다. 그리고 그 순간, 죽음을 마주한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어? 무언가 잘못된 것인가?’ 생각하며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그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지금의 내가 태어났다. 그가 사랑했던 여자의 얼굴을 하고서, 얼굴도 국적도 알지 못하는 남자가 쌓은 업보를 갚아야 한다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난데없이. 그가 가진 모든 능력과 경험과 반대되는 것들을 떠안고 태어나버린 것이다.
그 덕분에 이번 생의 나는 그가 한 실수들을 하나씩 마주한다. 전생의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하나하나 기억해 나가며 만회하고 있다. 그때는 갖지 못한 결핍들을 뭉텅 안고 태어나, 그가 놓친 것들을 주섬주섬 주워 담으며 채워 나가는 중이다. 이제는 이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면서. 그러나
이름도 얼굴도 국적도 모를 이 나쁜 새끼야, 적당히 하지 그랬냐야아아아아!!! 라고 외치고 싶은 적이 올해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생의 목표는 여전히 열반이다. 다음 생애 태어날 누군가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을 하고 태어나 나의 업보를 갚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러나
이름도 얼굴도 국적도 모를 이 나쁜 새끼야, 적당히 하지 그랬냐아아아아!!!! (x 무한 반복)
*니체의 말이라고 전해지는 이 말은 사실 “이것이 삶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이기보다는 “그것이 삶이었단 말인가, 좋다! 다시 한번”이 원문에 더 가까운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제가 원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싶어서 잘못 알려진 문장을 이 부분에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요 부분의 자문은 지피티에게 얻어서 썼습니다. 그러므로 이 정보 또한 지피티의 거짓 정보일 수 있으므로 잘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설명해 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