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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ty noodle Jan 26. 2023

수취인 불명

나를 짝사랑했을 당신에게

안녕하세요, 반가운 분.


살면서 여러 사람에게 종종 편지를 썼지만 당신에게는 처음 써보네요. 당연한 일이겠죠? 저는 당신이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 심지어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조차 알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그 어떤 편지를 쓸 때보다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는 사실을 알아주세요.


당신도 이 편지가 반갑고도 당혹스러우시겠죠? 저도 살짝 그렇습니다. 갑자기 웬 편지냐 물으시면은, 몇 주 전부터 함께하고 있는 온라인 글쓰기 모임의 이번 주제가 나를 짝사랑했던 사람에게 글을 써보는 것이었다고 핑계를 댈 수 있겠어요.

저는 쓰면서 당신은 읽으면서, 이 낯설고 경직된 마음을 살짝살짝 풀어보면 어떨까요. 살면서 이런 일 한 번쯤 겪어보는 것도 꽤 신선한 경험이잖아요. 일단 저는 미지의 당신에게 몇 자 적고 있는 지금이 무척 즐겁네요.



반가운 분께서는 설 연휴를 잘 보내고 무사히 일상으로 복귀하셨나요?


저는 나름 알차게 보냈어요. 어린 시절의 제 얼굴과 닮은 조카를 3일 연속으로 열과 성을 다해 놀아주었고, 이틀은 부모님의 냉전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본가를 오가며 명절 음식 준비를 하고 차례를 지냈답니다. 

연휴가 1.5일 남았을 무렵엔 친구 차를 얻어 타고 충동적으로 밤바다를 보러 다녀왔어요. 세차게 파도치는 바다 풍경을 원 없이 보고 물길에 자락자락 몽돌이 부딪치는 소리를 양껏 듣다 보니, 켜켜이 먼지 쌓인 마음이 싸악 씻기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오늘 아침엔 늦게까지 이불을 끌어안고 누워있었지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올해 겨울도 백수라서요. 어제오늘 날씨가 정말 추웠는데 추위를 뚫고 출근하지 않아도 되어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복에 겨운 게으름을 부리며 시간을 까먹다가 정오 가까이 되어서야 밥을 차려먹고 슬슬 오늘의 할 일을 하나씩 해나가고 있네요.

당신은 어떤 날을 보내고 있나요? 마음 따뜻한 설연휴를 보내셨기를, 너무 괴롭지 않은 일상을 마주하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그나저나 우리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요? 무언가를 배우다가 만났나요, 일을 하다가 만났나요? 아니면 취미활동을 하다가 만났나요?


제 생각에 우리는 한 번 보고 지나친 사이가 아닐 것 같아요. 제 얼굴은 지극히 평범한 편이라서, 당신이 길을 가다가 또는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 역과 같은 곳에서 저를 보고 "와, 저 사람에게 한눈에 반해버렸어!"라고 생각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이렇다 할 업적을 세울 만한 활동을 한 적도 없으니 당신이 어디에선가 저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우와, 이 사람 멋지다!"라며 추종자가 되어 마음을 키울 일도 없고요. 


아마 당신은 적어도 두어 번쯤, 저와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사람이겠지요.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저의 취향이나 가치관이 당신에게 어떤 울림을 주었고, 그 울림으로부터 당신은 저를 흥미롭게 여기기 시작했을 거예요. '저 사람을 더 알아가고 싶다'거나 '저 사람과 이야기를 더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호감으로, 그 호감이 짝사랑으로 발전했을 수도 있겠어요.


혹시 제가 아주 헛다리를 짚었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무척 즐겁게 또는 살짝 실망하면서 이 대목을 읽고 있을 수도 있겠군요. 그 감정에 저의 책임을 지우진 말아 주세요. 단지 '내가 타인이었다면 어떤 경위로 나를 좋아하게 될까' 상상 한 번 해봤을 뿐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니 더욱 궁금해지네요. 저의 추리력이 얼추 맞았을지 아니면 완전히 빗나갔을지. 어떤 대답을 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어떤 답을 듣게 되더라도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당신은 저의 무엇이 그렇게 좋았기에 짝사랑씩이나 하게 되었나요. 


아, '짝사랑씩이나'라는 표현이 과격하게 들리진 않았기를 바라요. 당신의 마음을 공격하려는 의도나 저를 비하하려는 뜻은 아니랍니다.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제가 또 짝사랑 전문이거든요. 짝사랑을 잘 알고 좋은 조언이나 상담을 해줘서 전문이 아니라, 금방 사랑에 빠져버리는 까닭에 짝사랑을 수도 없이 많이 한 까닭에... (적중률이나 승률 같은 건 묻지 말아 주세요...) 그래서 짝사랑이 얼마나 고달프고 마음 쓰이는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답니다. 

'짝사랑씩이나'라고 말한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셔요.


어쨌거나 당신도 저처럼 둔한 사람을 혼자서 좋아했다니, 당시에 꽤 심란하셨겠는데요. 심지어 여전히 이렇게 '날 짝사랑한 사람이 누구였을까?' 감도 못 잡는 저를 보면, 어휴... 미안합니다. 


그 왜 그렇잖아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의 별 것도 아닌 행동들이 다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별 뜻 없이 건네는 호의도 애정으로 착각하게 되는.

저는 별 것도 아닌 말에도 옥수수알 같은 덧니를 드러내며 크게 웃기도 하고, 어떤 말을 해도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너 얘기 잘 듣고 있어'라는 티를 내고, 가끔씩 오며 가며 다정한 말이나 달달한 주전부리를 건네기도 하는 사람이라 어쩌면 당신이 머릿속으로 소설을 몇 편이나 썼을 수도 있겠어요. 정말로 그러셨나요?

 

문득, 당신도 어쩌면 조용조용하고 용기가 많이 필요한 신중한 성격이라 제가 먼저 좋아한다고 말하며 다가와주기를 기다렸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도 하네요. 혹시 혈액형은 A형, MBTI는 I로 시작되는 유형인가요? 

어디에선가 I로 시작하는 어떤 유형의 사람은 깔끔한 옷을 입거나 멋진 신발을 신는 것이 그들로써는 가장 용기 낸 플러팅이라고 들었는데, 당신이 제게 그런 방식으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기를 바라요. 

저는 다른 사람이 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건 잘도 눈치채면서, 누가 저를 좋아하는 건 어지간해서는 정말로 못 알아차리거든요. 만약 옷차림이나 신발로 호감을 표시했다면 전 정말 당신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을 거예요. 물론 그 모습이 제 취향이었다면 '음, 옷을 단정하게 잘 입네'하고 생각하고 저 역시 당신을 눈여겨봤을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당신은 저에게 어떤 식으로든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나요? 아니면 멀리서 좋아하기만 했나요? 

어떤 방식이었다고 한들 그때 제가 알지 못한 것이 뒤늦게 아쉽네요. 딱 한 번만 크게 용기 내서 말해주지. 너랑 이야기하는 게 즐겁다고, 더 자주 만나서 보면 좋겠다고, 내가 사실 너를 좋아한다고. 그랬다면 제가 짝사랑을 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짝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무척 기뻐했을 텐데요.

그리고 또 모르죠, 짝사랑 전문인 저 역시 당신을 속으로 좋아하고 있었을지도. 만약 우리의 마음이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우리가 지금보다 더 젊고 아름다웠을 때, 귀엽고 즐거운 추억을 몇 개쯤 함께 쌓을 수 있었을지도.


만약 당신이 용기를 내서 저에게 무언가 말했는데 '엥? 어째서?'라고 당혹스러워하면서 당신의 호의를 거절했다면, 마음에 상처를 준 일에 대해 늦게나마 사과드립니다. 

아마 당시의 제가 연애 중이었거나, 다른 사람을 짝사랑하느라 정신이 팔려있었거나, 당신의 어떤 면이 저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흠, 적고 보니 썩 위안이 되는 말들은 아닌 것 같군요. 그냥 우리의 인연이 그것으로 다했던 것이라 여기기로 해요. 마음과 마음이 엇갈리는 일은 살다 보면 자주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쓰다 보니 말이 무척 길어졌네요. 받는 이를 알지 않고도 저는 이렇게 술술 떠들 수 있다니, 새삼스레 놀라고 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이 점점 산으로 올라가고 있으니 정상에 도달하기 전에 슬슬 마무리해야겠어요. 

어쩌면 당신은 이 편지를 보고 '아, 역시 마음 접길 잘했다'라고 안도할 수도 있고 '어? 이 사람 역시 조금 더 알아봤어야 했는데'하고 후회할 수도 있겠지요.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답장을 보내주세요. 

우리가 보다 가까워진 마음의 거리에서 눈길을 주고받으며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명확한 수취인의 이름과 저의 하찮은 잡담이 적힌 편지를 새로 받게 될지 모를 일이니까요. 물론 이 편지가 당신에게 가닿을지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요.


자 그럼 정말로 작별의 인사를 해볼게요. 허접한 변명과 딱히 알고 싶지 않은 정보가 잔뜩 담긴 저의 혼잣말을 재미있게 읽어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언젠가의 저를 따스한 눈길로 바라봐주었던 당신에게 보드라운 감사의 마음을 전해요. 

늘 몸과 마음 건강히 챙기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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