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이에게

by party noodle

아가야 안녕, 네가 영영 볼 일이 없는 편지를 쓴다.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쓰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날이 다 온다. 글을 쓴다는 일은 참 재미있고 신기하고 알 수 없는 일이야. 그치?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다. 내가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을 네가 보고 듣지 못하는 일이. 수취인이 불명확한, 아니 없을 것이 분명한 편지를 쓰는 일은 늘 마음이 아픈 일이야.


내 안에 있던 한 부분이 무언가와 결합하고 수정되고 분화되고 자라서 네가 되는 것이라면, 너는 너무나 오랫동안 들어와서 잘 알겠지. 내가 너를 낳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영영 만날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너와 만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어. 다짐은 변함없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 다짐에 따라붙은 이유가 너무도 많이 복잡해지고 달라졌지.


어릴 때의 나는 단순히 아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너를 낳지 않겠다고 생각했어. 옹알이 밖에 하지 못하는 아가든, 낱말이나 어설픈 문장을 뱉어내는 아이들이든 나는 어린 존재들이 싫었거든.


말이 통하지 않아 무엇을 원하는지 속을 알 수 없는, 뭐라도 맞춰주려고 노력해도 그 마음도 모르고 빽빽 울어 제끼는, 용기를 내어 친한 척을 하는 나를 외면하는 그 어린것들이 나는 싫었지. 혀 짧은 목소리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 하는 것도 없이 어른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도 질투가 났지.


좋아하지도 않는 존재를 위해서 아홉 달 동안 고생할 자신이, 그 고생 끝에 마주할 생살을 찢는 고통을 참을 자신이 없었어. 누구나 아픈 것을 싫어하지만, 나는 아픈 것이 유난히 싫고 또 무서워. 싫고 무서운 것을 기꺼이 견딜 수 있을 만한 이유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고민 끝에 용기를 내는 사람이지만 나는 도무지 모르겠더라. 어린 내게는 아가들을,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애정 어린 존재로 느낄 수 있는지.



그런 나를 알기에 오빠는 조카를 갖기 전에 내게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말한 적이 있었어. “너 조카 생기면 미워하면 안 돼. 예뻐해 줘야 돼.” 내가 얼마나 아이들을 미워하는 사람이었으면 친오빠가 그런 말을 다 할까. 그때는 그랬지.


그런데 조카가 생기고 나니, 어린 시절 내 얼굴과 이상할 만큼 닮아있는 그 조그마한 존재와 만나고 나니, 자연스럽게 아가들을 좋아하게 되더라. 나에게도 모성애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그 아이가 자라면서는 그 아이 또래의 아이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


자기도 사람이라도 꼬물꼬물 움직이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나를 알아보는 건지 뜻을 알 수 없는 소리와 몸짓으로 알은체를 하고, 어설프게 내 말과 표정을 따라 하고, 어느 새엔가 “고모!”라고 부르더니, “고모 좋아”라던가 “고모 보고 싶어”와 같은 말을 하게 되어버린 그 생명체가 너무너무 소중하더라.


그 아이를 시작으로 세상의 많은 아이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졌어. 모든 아이들은 태어났다는 사실 만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고, 따사로운 눈빛으로 비춰지고, 충분히 사랑을 느끼며 자라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어.


그래, 어린 나는 아이를 싫어했기 때문에 너를 낳기 싫어했지만, 나이를 조금 더 먹은 나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낳고 싶지 않은거야. 모순적이라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가뜩이나 불안이 높고 쉽게 애착을 느끼는 내게 너의 존재는 분명 괴로움이 되고 말 거야. 한 달, 두 달 내 안과 네 안에서 장기들이 생겨나고 자라나고 하나의 생명이 되어가는 와중에 내 실수 하나로 어떻게 되진 않을까 걱정하느라 속이 타겠지. 무언가를 잘못 먹어서, 무언가에 감염되어 버려서, 무언가에 실수로 부딪혀서, 무언가를 내가 알아차리지 못해서 네가 잘못되면 어쩌지.


그렇다면 나는 너무 괴로울 거야. 상실감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리움에 깊이 빠져 애도의 과정이 지난한 나에게 그건 생각만 해도 마음속이 써늘해지는 일이야.


엄마는 나를 낳기 전에, 오빠와 나 사이에 유산된 아이가 셋이라고 했어. 그중에는 아빠가 아주 징그러운 꿈을 꾸고 나서 사라진 아이도 있다고 했지. 젊은 엄마와 아빠는 그 상실감을 어떻게 견뎠을까? 그 아이들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할 내가, 기껏 그 아이들 대신에 태어난 내가 나이를 먹도록 속을 썩일 땐 ‘얘 대신 그 애들 중 하나가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아쉬워하진 않았을까?



너를 낳은 뒤에도 나는 너무 무서울 거야. 분명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어린애들에게 관대한 어른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아이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자기들 또한 한때는 아기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


울고 떼쓰고 때때로 실수하는 자신들을 견뎌준 사람들이 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는 것은 까먹고, 아이들이 울고 떼쓰고 실수하면 차가운 시선을 보내지. 부끄럽지만 얼마 전까지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어. 분위기가 근사한 카페나 식당엔 아이들이 와서 분위기를 깨면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따가울 만큼 눈을 흘기던.


어린아이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면 우리나라 엄마들은 비행기에 탄 승객들에게 아이가 울 것을 대비해 양해를 구하는 쪽지와 주전부리를 준비한단다. 아이가 우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꼭 하면 안 되는 일을 해서 너무나 죄송스럽다는 듯이, 우는 아이의 존재가 커다란 민폐인 것만 같이. 누군가는 ‘애기 엄마가 사려 깊네’라며 흐뭇해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일이 못마땅하게 느껴진다.


‘아이가 비행기를 타면 어른보다 불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고, 자기도 살겠다고 엄마한테 표현하느라 우는 일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당신도 이유가 있어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비행기를 탔겠죠. 사람들의 귀가 터지도록 우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보거나 달래려 하지 않는 ‘애가 우는데 나보고 어쩌라고요’라고 하는 그런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아이는 자기의 몸이 보내는 신호에 따라 울음을 터뜨릴 뿐이고, 당신은 최선을 다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 거잖아요.


미리부터 과도한 사과와 양해를 구할 것까지는 없지 않나요. 우리도 다 그 시기를 지나왔잖아요. 매너나 배려로 포장하는 일이 나중엔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 그래서 그 당연한 것을 하지 않는 사람이 뭔가 잘못된 사람이 될까 봐 겁이 나요.’



네가 자라나서 어린이가 된 이후로도 나는 여전히 두려움을 거두지 못할 것 같아. 간혹 뉴스에서 보이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의 학대들, 벌건 대낮에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벌어지는 범죄들.


오프라인뿐만이 아니라 온라인이나 TV에서도 안심할 수 없지. 어린 네가 이것저것 누르다가 노출되게 될 이상한 컨텐츠들, 어린 너희들을 고려하지 않고 어른의 입장에서 애들 입맛에 맞춘 어설픈 프로그램들, 나는 너의 동심을 오래오래 지켜주고 싶은데 어떤 철없는 어른들은 마치 ‘얼른 현실을 알아라, 애송이들아!’하고 스포일러를 뿌려대기도 하지.


아마 너를 키우기 위해서라면 나는 돈을 벌어야 할 테고, 그럼 너를 매 순간 따라다니거나 네가 무엇을 보는지 감시할 수는 없겠지. 그게 가능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네 숨이 막히겠지. 아무튼 이런저런 위험에 처할까 봐 불안할 내 마음을 어쩌지.



네가 그 시기를 무사히 넘겨서 청소년이 된다고 해도 나는 불안을 놓지 못할 거야. 네 안에서 일어나는 외로움, 폭풍 같은 혼란함을 나는 겪었으니까. 겪어봤기에 그것이 괴로운 줄은 알아도, 얼마나 어떤 형태로 괴로운지는 가늠이 되지 않아서 막막하고 먹먹하겠지.


눈높이를 맞추어 네가 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며, 너에게 도움이나 위안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엄마로 네 옆에 있을 수 있을까? 오히려 너무 가까운 사이라 너를 위한다는 핑계를 대며 네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닐까? 너를 더 외롭고 괴롭게 하지는 않을까?


지금이야 많은 것들을 거쳐왔기 때문에 ‘다 지나가더라’하고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내가 겪었던 혼란과 외로움을 네가 경험해야 한다면, 그 낯설고 막막한 감정 속을 헤매고 견뎌야 한다면, 하루에 몇 번이나 ‘나는 왜 태어났을까.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주체가 되지 않는 분노로 일기장 안을 채워야 한다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된다면.


내가 너에게 ‘다 지나간다, 조금만 참아’라고 말하는 것이 네게는 너무나 공허하게 들리진 않을까. 오히려 그 말이 너를 더 못 견디게 만들지는 않을까.



네가 성인이 된다면 다 괜찮아질까? 아니, 성인이 된 네가 마주할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지금보다 더 비정하고 거칠까 봐 걱정이야. 내가 갖는 심각하고 무거운 마음에 비하면 걱정이라는 단어는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져. 적절히 골라 쓸 단어가 없어서 걱정이라 말할 뿐이지.


환경은 더욱 오염되어 알 수 없는 전염병과 기후 현상들이 우리들을 두렵게 하겠지. 윤리 없이 발전한 과학 기술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 따위 지키는 일은 사치가 될 수도 있겠지. 생명은 연장되었지만 권태롭고 의미 없는 날들을 연명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런 삶을, 그런 환경을 네가 견뎌야 할 것을 생각하면, 그 무의미와 공허감 속에서도 의미와 가치를 찾아보겠다고 발버둥 칠 너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애처로와서 마음이 미어져. 나이를 먹을수록 삶은 고통이라는 말의 의미를 가슴 깊이 알게 될 너를 생각하면 죄를 짓는 기분이야.



나의 아이야, 우리가 만날 수 없는 데에는 이렇게나 수많은 이유가 있어. 너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네가 얼마나 긍정적이고 강인한 아이인지는 모르겠어. 그렇다면 너는 나를 원망할 수도 있겠지. 왜 당신 마음대로 나를 태어나지 못하게 막았느냐고. 그러나 그런 너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소중할 너를, 분명 그 어떤 존재보다 사랑할 너를 만나서 좋은 엄마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까?

아니, 미안. 그러기엔 내가 너무나 미성숙하고 부족해. 나는 아직 나를 믿지 못하고, 남도 믿지 못하고, 세상도 믿지 못해. 언젠가 한 사람의 몫을 하는 것을 넘어 다른 생명의 삶을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해지면, 나와 남과 세상을 믿게 된다면, 믿어보고 싶게 된다면, 그때는 아마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일 거야. 너를 내 몸으로 낳아 기르기엔. 나는 우리가 건강하게 만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데 말이지.


아쉽게도 이번 생의 목표가 열반이라, 만약 내가 그 목표를 이루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로 영영 볼 일이 없을 거야. 그러나 혹시나 이번 생에 아차차, 삐끗해서 다음에 한 번 더 태어나게 된다면 그때는 조금 더 일찍 성숙한 존재가 되어서 너를 만나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르겠어.


어쨌든 이번 생에 우리는 만나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건 네가 미워서가 아니라 너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걸 꼭 알아줬으면 해. 나는 가닿지 못하는 마음들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잘못 해석되는 마음들이 너무나 슬프더라. 그래서 내 마음이 왜곡되지 않고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가을에 진심을 담아 이 편지를 쓴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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