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이름없는 사람들의 자리

by 박거행

시청 구내식당을 내려가는 계단 벽에 동양화 몇 점이 걸려있다.

먹으로 그린 산수화, 끝 여백에는 ‘戊子年夏’(무자년하 –무자년 여름)라는 글귀와 낙관까지 찍혀 있다.

그런데 액자 밑 설명은 이렇게 되어 있다. 「작자미상」.

그림 속에 이미 글씨와 낙관이 있는데도, 한자를 모른다는 이유로 ‘작자미상’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걸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름은 있는데, 보는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면 없는 이름이 되어버리는 현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정체성도 사라지는 사회. 나도 모르게 분류가 되는 것이다.


그림 하나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름 없는 사람들, 잊혀지는 자리, 존재가 지워지는 순간들.

세상은 점점 빠르게 돌아가고, 효율과 실적이 모든 걸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간다.

그럴수록 누군가는 이름도 없이 결과만 남기고 사라진다.

기획을 짜고, 자료를 정리하고, 회의 준비를 하던 실무자들은 기억되지 않는다.

결재한 이름만 남는다. 브리핑한 말만 기억된다.


우리는 가끔 너무 쉽게 판단한다.

겉으로 드러난 성과만 보고, 말이 빠르고 자신감 있는 사람에게만 박수를 보낸다.

그러다 보면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 혹은 단지 운이 덜 따랐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작자미상’이 되어간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름 없는 사람들 덕분에, 많은 일이 굴러간다고 믿는다.

함께했던 동료들, 항상 앞자리에 서진 않았지만 묵묵히 뒷일을 맡아주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있었기에 어떤 일은 가능했고, 어떤 상황은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작자미상이라는 말은 때로 가장 무거운 이름이다.

이쯤에서 문득 군대 시절이 떠오른다.

신병교육대 13중대. 매일 아침 구보 중에 부르던 중대가(中隊歌)가 있었다.

6주간 불렀는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묵직한 노래.

“임진강 물결 위에 울려 퍼진 뇌성,

나라 위한 충정 속에 약동하는 젊음의 소리…”

이 노래가 진짜 작자미상이다. 노래는 알려주었지만 누가 지었는지는 알려주지 않아서 모른다.

작자미상, 네 글자 속엔 익명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이름이 아니라 마음으로 남는 사람들, 앞에 서진 않아도 뒤에서 조용히 바람을 막아주는 사람들.

우리는 그런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민감해야 한다.

그들의 노력이, 오늘 우리의 삶을 조용히 떠받들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가을밤의 편지 같은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