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좋은 오후

by 유재은


하루 만에도 바뀔 수 있는 마음. 아니 몇 시간 만에도 마음은 겨울과 봄 사이를 오간다. 죽을 것 같이 힘든 시간들도 온 힘을 다해 버티고 견디어 내다 보면 짧은 순간이나마 숨이 쉬어지는 때가 온다.


헝클어진 뒷머리를 하고 제 맘대로 하겠다며 엄마를 애태우는 꼬마의 한없이 천진한 얼굴.

언제 내 앞에 왔는지 길을 잃었다고 말하는 동화 속 공주 같던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

처음 타는 남산 가는 버스 안에서 바라본 창밖의 초록과 바람의 어루만짐.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반가운 작가의 신간을 만나는 오후.

글을 쓰다가 어느새 밤이 되어 버린 카페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운전하는 시간.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염없이 바라보는 바다.

출근하는 내게 한 손을 올려 우는 시늉으로 인사하는 남편의 배웅.

고운 한복을 입고 장난스레 창경궁 안을 걷고 있는 두 딸의 뒷모습.


눈부신 5월의 햇살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시간들. 그동안 살면서 편안한 숨쉬기를 이토록 고마워했던 적이 있을까. 코로나로 인한 제한적 삶을 살다가 비로소 되찾은 일상. 여전히 하루하루 어쩌면 이렇게 삶이 힘겨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짧은 순간의 숨 쉬기로 다시 어깨를 펴고 걷게 된다.


며칠 전에는 아파서 누워 있는 동안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라는 영화를 보았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동화 같은 스토리로, 요즘에는 보기 드문 아날로그 감성의 영화였다. 고된 가사도우미 일을 하면서도 타고난 밝고 선한 성품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따스함을 전하는 해리스 부인. 그녀가 인생의 가을 처음으로 갖게 된 꿈을 향한 여정이 너무나도 곱고 아름다워서 보는 내내 마음이 환하게 차올랐다. 어떤 자리에서든 자신만의 색으로 특별하게 채워가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와 미소. 애틋한 그녀의 살아감에서 다시 한번 용기를 얻어본다.


거센 파도에 휩쓸려 흔들리고 흔들리다 보니 어느새 지난가을에 만났던 친구는 봄꽃이 다 지도록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을 버티어 내다보니 이렇게 햇살 좋은 5월의 오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