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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게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에요

by 유재은


"자유롭게 써 보세요."


이렇게 말하면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자유롭게 써야 할 때 어려워해요. 그래서 이내 주제를 정해달라고 말하지요.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하고 정답이 있는 학습에 익숙해서일까요. 자유 주제로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정작 주제를 알려주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제키워드를 듣자마자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쓸게 없다고 하소연하지요. 한 명이 먼저 그렇게 말하면 곁에 있던 아이들도 우르르 "생각이 안 나요!"를 외칩니다. 아이들에게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쓸 게 없어요."예요. 그럴 때면 이야기합니다. 쓸 게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고요. '글은 쓰면서 생각'하는 것이니까요.


물론 꺼내 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어요. 글쓰기는 자신 안에 가득 찬 알 수 없는 생각의 물결을 따라가다가 보물찾기 하듯 단어를 찾아 문장으로 엮는 데서 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과 타인의 행동과 말을 돌아보면 생각을 키울 수 있어요.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면 어느새 조금 성장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고요. 아무리 말해도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니 아이들에게는 10분만 생각해 보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또 아이들은 1분도 되지 않아 "모르겠어요!"를 외치지요.


그때는 주어진 생각 시간을 채울 수 있도록 격려해 준 후 타이머가 울리면 같은 주제로 쓴 다른 아이의 글을 읽어줍니다. 느낌을 살려 생생하게 읽어주면 아이들은 금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듭니다. 아이들에게 영감이 떠오를만한 글을 엄선해 읽어주기에, 낭독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비슷한 경험을 말하기 위해 서로 앞다투어 손을 들곤 합니다. 그러면 한 명씩 '마음껏 이야기'하게 해요. 다른 친구들은 '깊이 경청'하게 하고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꺼내 놓은 후 그걸 써보자고 하면 한 두 명씩 무언가가 생각난 듯 반짝이는 눈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지요. 반면 어떤 아이들은 예시글을 읽어주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글에 갇혀 비슷한 글을 쓸 것 같다고 하면서요. 그런 아이들이 많다면 바로 쓰게 하는데 대부분은 읽어달라고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수업을 하지요.


저학년이나 중학년 친구들에게는 그림과 글쓰기를 접목한 '창의 논술'이 효과적입니다. 글쓰기 수업에 와서 그림을 그리면 미술 수업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고학년 친구들도 좋아하는데, '즐겁게 글을 구상해 낼 수 있는 방법'입니다. 주제키워드와 관련된 그림을 그리면서 쓸거리가 생각나면 글을 쓰고, 다시 막히면 그림 그리기를 병행하는 것입니다. 원고지나 흰 종이가 아닌 다양한 색깔과 질감의 종이, 연필이 아닌 색연필과 사인펜 등으로 도구에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도 막혔던 생각의 고리가 풀리며 글쓰기에 대한 거부감이 사그라듭니다.


그렇게 완성된 소중한 글은 반드시 '발표'하게 합니다. 글쓰기 수업의 마무리이지요. 개인적인 이야기로 공개하고 싶은 것은 생략하면서 읽게 하고요. 발표 후에는 그 '글에 대한 좋은 점'을 한 명씩 말하게 해요. 어렵게 글을 완성한 후 생각보다 스스로도 마음에 들고 친구들의 칭찬 피드백까지 듣고 나면 발표자는 뿌듯한 표정을 짓습니다. 으쓱해진 어깨로 "저 글 쓰는 게 좀 재미있어졌어요."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요. 자신의 꿈이 바뀌었다면서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그 말들을 들으면 제 마음까지 환해집니다.


하지만 가끔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록 가만히 앉아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아이 곁에 가서 다른 아이들은 모두 쓰고 있는데 혼자만 빈 종이 앞에 있어 쫓기는 듯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말벗이 되어줍니다. 주제키워드에 관한 질문을 시작하지요. 아이가 잊었던 일들을 마음 안에서 꺼내놓을 수 있도록 말이에요. 오래도록 말이 없다면 저의 경험을 먼저 꺼내요.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아이의 눈이 반짝입니다. 비로소 제가 슬며시 뒤로 갈 차례가 된 거예요.


그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하냐고요? 다음 화부터 시작되는 '키워드 [생활문] 쓰기'를 따라 찬찬히 써 보면 조금씩 자신감이 차오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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