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록

by 유재은


‘봄빛’ 하면 떠오르는 것은 다채로운 꽃의 빛깔이 아닌, 연초록이다. 단단한 겨울의 껍질을 깨고 찬란한 봄의 시작을 알리는 연초록은 갓난아기처럼 싱그럽다. 다부진 생명력 속에 여린 마음의 결을 품고 있다. 첫 등교, 첫 출근, 첫사랑처럼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닮았다.


연초록의 눈부신 빛깔은 보는 이의 마음에 기운을 북돋아 준다. 긴 겨울을 지나 만나는 연초록의 향연이 옛 친구를 만난듯하여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은데, 얄궂게도 인사만 남긴 채 사라지기에 더욱 애틋해진다.


어릴 때 학교 숙제로 강낭콩을 키워본 적이 있다. 숙제이기에 심드렁했던 마음을 단번에 녹여준 것은 연초록의 작은 싹이었다. 아기처럼 느껴지던 그것은 내게 앞으로 잘 키워 보고 싶다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하루하루 조금씩 변화되는 식물의 자라남을 보며 얼마나 신기했던지. 지금 생각해 보면 도심에서 무언가를 키워 볼 수 없던 나에게는 쌍떡잎식물과 같은 생물학적 지식의 습득보다 더 큰 마음으로 자리매김하지 않았을까 싶다.


살다 보니 어느새 몸과 마음이 가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익숙한 공간과 생활에서 떠나고 싶으면서도 일상의 패턴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코로나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먼 곳에서 마주하게 될 예기치 못할 상황들에 대한 염려로 떠나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져 버렸다. 어느 날 아침 먼 곳에서 들려오는 북소리로 유럽을 향해 긴 여행을 떠났다던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청춘을 지난 내게도 나를 이끌어 줄 먼 북소리가 들려올 수 있을까.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 나에게는 연초록의 꿈들이 있다. 동네 책방 지기가 되어 읽고 쓰는 삶을 살아가는 것. 연예조차 책으로 배웠던 나는 무슨 일을 하든 책부터 먼저 찾아 읽기에 지난 몇 년 간 관련 책들을 살펴보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낭만이 아닌 현실로서 서점 운영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것이 현재의 내 삶을 무기력하게 한다. 낯선 사람 만나는 것을 어려워하는 내가 서점 지기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이 책을 매개로 한 만남이라면 조금은 수월해질까. 오로지 책 판매만으로는 생계를 꾸려가기 힘들다고 하는데 현재 성과를 거두고 있는 내 일을 그만두는 게 옳은 선택일까. 새로운 도전으로 인한 현실적 어려움과 경제적 편안함을 따라가는 공허한 마음 사이에서 연초록의 마음이 흔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초록 향기를 품은 먼 북소리가 오늘도 나를 일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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