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치앙마이 여행
2026년 2월 16일 월요일
작심삼일은커녕 작심일일이 되었던 일기를 다시 회생시켜 본다. 오늘은 숙소를 옮겼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며 한참을 빈둥대다 무한리필 샤브샤브집에 가서 거하게 먹고, 산책하고, 쇼핑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아직도 낯선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나 몸이 기억하는 익숙함이 있다. 이렇게 온전히 익숙해지면 또 한국으로 돌아가 낯선 기운을 밀어내고 살겠지.
오늘은 숙소 이야기를 남겨보려고 한다. 관광은 거의 하지 않는, 현지인에 가까운 삶을 따르는 여행은 꽤나 단순하다. 거기다 새로운 정보를 찾는데 취미가 없는 본인으로서는 갔던 동네, 갔던 숙소, 갔던 식당, 갔던 공원, 갔던 카페를 선호한다. (이것은 여행이 아닌 일상생활에서도 동일하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익숙한 숙소를 다시 찾는 편인데 이번 여행은 새로운 숙소를 도전해 보았다. 참고로 공용화장실만 아니라면 숙소 컨디션에 개의치 않으며, 벌레나 청결에도 그리 예민한 편이 아니다. 숙소의 퀄리티보다는 익숙한 지리가 중요하고, 수영장보다는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게 귀찮아서) 조식을 선택한다. 좋은 리조트나 럭셔리한 호텔을 누가 싫어하겠냐만은 여행의 조건에 있어 적어도 내겐 숙소가 크게 영향을 주진 않는다.
물론 예외적인 숙소도 있다. 도착하자마자 찾았던 곳은 (저번에도 밝혔지만) 애정해 마지않는 곳이고, 예약 날짜가 가능했다면 더 길게 묵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곳은 내게 '숙소'가 아니라 '집'인지도 모른다. 여튼 뭐- 그러하므로 이곳은 예외이자 번외.
그간 여러 형태의 숙소에 묵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또 새로운 형태를 마주했다. 분명 간판은 호텔인데 아파트형이랄까, 콘도형이랄까, 거주를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곳을 호텔로 운영하는 느낌이랄까. 방은 전체적으로 낡았지만 꽤 넓고 쾌적하다. 부엌, 거실, 침실, 화장실. 개인적으로 습한 공간을 좋아하지 않는데 발코니까지 딸린 넓은 창문 덕분인지 공기가 바삭하고, 무엇보다 거실과 침실이 문으로 구분되어 있는 형태가 마음에 든다. 비슷한 소재로 만들어진 듯한 나무 옷장, 나무 서랍장, 나무 찬장, 나무 신발장이 마치 한국에서 유행했던 90년대 가구 톤과 비슷해서 어렸을 때 주택에 사는 친구집에 놀러 갔을 때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사용감이 있는 보풀이 일어난 소파도, 삐걱거리는 나보다 작은 냉장고도 귀엽다. 에어컨은 아주 낡고 청소를 언제 했을지 모를 비주얼이지만 어차피 더위를 타지 않아 작동시킬 일이 없다. 의도치 않게 화장실의 하수구 상태를 보고 말았지만 시력이 아주 좋지 못하므로 굳이 다시 보지 않으면 괜찮다. 노프라브럼.
호텔 1층 체크인 로비 앞으로 조식을 먹을 수 있는 조그마한 카페도 있고 식당, 술집, 마사지샵도 위치해 있다. 나름 주상복합이랄까. 저녁 먹고 아무 골목이나 막 들어가 걷는 산책을 했는데, 이 호텔 안쪽으로 꽤 큰 주거단지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치앙마이대학교가 가까워서인지 학생과 외국인이 꽤 많이 거주하는 것처럼 보였고, 입구마다 경비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발코니를 꾸미는 문화가 있는 건지, 건물 자체가 그렇게 시스템화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꽤나 화려한 조명이 눈길을 끌었다. (쓰면서 생각해 보니 명절맞이일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이 근처는 아무래도 장기거주자를 위한 구역인 듯하다.
금요일까지 이곳(님만)에 쭉 머무르다 주말에는 올드타운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개인적으로 님만보다 올드타운을 더 좋아해서 타패 근처에 머무르는 편인데, 구내식당처럼 찾았던 가게가 사라진 소식을 접하고 흥이 살짝 떨어져 버렸다. 이번 여행은 빠이를 가지 않고 내내 치앙마이에만 있을 참이라, 부러 빠이 분위기가 나는 숙소를 예약하고 은근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그간 묵었던 숙소들을 빠르게 더듬어본다. 생애 첫 태국 여행에서 첫날 묵었던 카오산의 숙소는 벽과 바닥이 모두 타일이라 마치 화장실에서 자는 것 같았던 강렬한 기억이었다. 1층에서 치킨누들(지금은 팔지 않는다 매우 아쉽다)에 창 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태울 수 있는 그곳은 내게 방콕의 표지와도 같다. 샴발라 축제에 가서 묵었던 치앙다오의 숙소는 렌탈 텐트보다 따뜻하겠지 싶어 예약했으나 밤새 한숨도 못 잘 만큼 추웠다. 샤워실 천장이 뚫려있는 게 아니라 그냥 존재하지 않아서 자연에서 샤워하는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달까나. 빠이 시내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면 온천, 수영장이 딸린 리조트가 있다. 입장권을 지불해도 이용이 가능하나, 숙박하면서 밤에 하는 온천이 극락이다. 샴발라 시즌에는 아주 멋진 언니들이 거쳐가는 곳이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제 보니 기억할 수 있는 숙소가 있다는 것, 다시 찾아가고 싶은 숙소가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부디 좋아하는 공간들이 오래오래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졸린다. 이제 자야지.